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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밤보다 더 밤 같은 한낮

등록 2018-10-13 11:18수정 2018-10-13 11:25

[토요판] 도르리의 골목 도르리 ③ 밤이 깨우는 풍경
햇빛 아래 조용하고 쓸쓸한 동네
어둠 내리면 생기가 살아나는 밤
① 인천 동구 만석동 괭이부리마을 윗동네의 낮. 햇빛 들지 않는 낮의 골목은 밤처럼 어둑하다.
① 인천 동구 만석동 괭이부리마을 윗동네의 낮. 햇빛 들지 않는 낮의 골목은 밤처럼 어둑하다.

▶ ‘도르리’는 음식을 차례로 돌려가며 내어 함께 먹거나 어떤 것을 똑같이 골고루 나누는 일을 뜻합니다. ‘창작집단 도르리’는 인천 동구 만석동 기차길옆작은학교에서 자라거나 활동해온 이모·삼촌의 창작 공동체입니다. 김성수·오정희·유동훈 세 사람이 함께합니다. 그들은 예술활동을 통해 ‘가난하면 행복하지 않다’는 편견을 무너뜨리길 꿈꿉니다. ‘도르리의 골목 도르리’는 그림, 만화, 인형 등으로 우리가 사는 동네와 골목, 사람, 세상을 격주로 이야기합니다.

보금자리 임대주택이 있는 윗동네는 우리 동네(인천시 동구 만석동 괭이부리마을)의 옛날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러나 빈집이 많아 낮에는 골목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골목과 골목 사이 자투리땅마다 푸성귀가 자라고 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손바닥만한 땅도 그대로 두는 법이 없다. 마침 골목 어귀 텃밭에 쭈그리고 앉아 뭔가를 심는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 뭐 심으세요?”

“배추. 어제 마트에 배추 사러 갔더니 아휴 매가리가 없어 색도 노랗고. 올여름이 오죽 더웠어? 저 봐, 고추들도 다 키도 안 크고. 집이 헐려서 빈 땅이 많아. 여기다 배추 심어 김치 담가 먹어야지.”

“할머니는 어디 사세요?”

“저기 골목 끝에. 내가 여기서 50년도 넘게 살았어. 내 인생을 여기서 다 보냈어. 그런데 이제는 옛날에 같이 살던 사람들이 다 죽거나 이사를 갔어. 쓸쓸해.”

할머니의 말에 내 가슴에도 골바람이 분다.

할머니를 뒤로하고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동네 골목은 볕이 들지 않는다. 빛이 없으니 골목의 낮은 어둡다. 밤보다 더 밤 같은 한낮은 조용하다 못해 쓸쓸하다. 그 골목을 길고양이가 그림자처럼 오간다. 누군가 폐블록과 나무판자로 고양이들의 집을 지어놓았다. 빈집이 더 많은 우리 동네 골목의 주인은 이제 길고양이다.

캄캄한 밤, 다시 한번 낮의 그 골목을 오른다. 캄캄한 골목마다 빛이 새어 나온다. 그 불빛을 따라가보았다. 백열등 불빛에 막다른 골목 안의 살림살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참방참방 물소리, 까르르까르르 아이의 웃음소리, 따뜻하고 다정한 엄마의 목소리도 들린다. 밤늦게 일터에서 돌아온 엄마가 어린이집에서 데려왔을 아이를 씻기는 모양이다. 골목 안에 세워둔 세발자전거의 주인일 아이의 밤이 따뜻하다. 옆 골목에서는 낮에 만난 할머니의 기침소리가 들리고 어디선가 고양이들끼리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밤은 골목에서 잠자고 있던 소리를 깨우고 사물들을 깨운다. 스산하기 짝이 없던 골목이 따뜻해진다. 내 마음에도 온기가 돈다.

우리 동네 골목은 밤이 낮보다 환하다.

그림·글 김성수, 만화 오정희

② 인천 동구 만석동 괭이부리마을 윗동네의 밤. 백열전등이 켜지면 밤의 골목에서 사물이 깨어난다.
② 인천 동구 만석동 괭이부리마을 윗동네의 밤. 백열전등이 켜지면 밤의 골목에서 사물이 깨어난다.
③ 인천 동구 만석동 괭이부리마을 윗동네. 엄마가 아이 손을 잡고 들어가는 골목에 뒤바뀐 낮(①)과 밤(②)이 있다.
③ 인천 동구 만석동 괭이부리마을 윗동네. 엄마가 아이 손을 잡고 들어가는 골목에 뒤바뀐 낮(①)과 밤(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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