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공간 ‘도르리’(인천 동구 화수동) 근처 초등학교 긴 담장 아래에는 길 가다 쉴 수 있는 의자가 놓여 있다. 그중 한 의자에는 사람만한 피노키오 인형이 앉아 있다. 어느 날 길을 가는데 내 또래로 보이는 한 청년이 그 피노키오 인형을 꼭 끌어안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말 못하는 피노키오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그 청년은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저릿저릿했다. 태안화력발전소 외주업체 비정규직 노동자였던 고 김용균씨의 분향소를 다녀온 지 얼마 안 돼 또 다른 20대 노동자의 죽음 소식을 들었던 탓인지, 우울증을 겪는 또래들을 본 탓인지, 그 청년의 모습이 몹시 슬프고도 아프게 다가왔다.
전태일 열사가 돌아가신 지 49년이 지난 지금까지 청년노동자들의 삶은 달라진 게 없다. 광고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며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이 하는 대학 동창은 정규직 직원과 똑같이 일하는데도 야근수당도 택시비도 받지 못한다. 유통회사에서 일하던 친구들은 정리해고를 당하고 먼 타국으로 가 일을 하고, 다니던 직장에서 계약기간이 끝난 친구들은 실업급여를 받으며 일을 구하고 있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친구는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을 사람들이 주변에 없다며 외롭다고 하소연을 했다.
청년 세대에게 따라붙는 온갖 수식어들. 젊음, 열정, 꿈, 무한한 가능성, 모험, 도전, 미래의 주인공 등 청년을 따라다니는 미사여구들은 정부나 기업의 홍보문구에서나 쓸모 있을 뿐이다. 얼핏 보면 우리 사회 모두가 청년 세대를 몹시 아끼고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 진입의 높은 벽과 장애물, 불통 앞에서 절망하고 좌절하는 우리의 진짜 목소리에는 귀 기울여주지 않는다.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우정, 사랑, 결혼까지 미루며 최선을 다하지만 언제나 제자리다. 정규직이 되길 꿈꾸며 열악한 노동환경을 견뎌내던 24살 청년이 죽었는데 제대로 된 진상규명은커녕 가속화되는 위험의 외주화를 막을 길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 청년 세대가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몰두하는 이유는 외로움, 누군가와의 소통을 갈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의지를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는 ‘좋아요’와 ‘싫어요’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청년세대들은 엄지와 참 많이 닮은 것 같다. 몸집은 어른만하지만 아직 키는 다 자라지 못해 어딘가 불완전해 보이는 엄지손가락, 다른 손가락과 가까이 있지 못하고 손바닥 옆으로 돌출되어 외톨이처럼 떨어져 있지만, 모든 손가락 끝과 맞닿을 수 있는 유일한 손가락.
어쩌면 우리 청년들이야말로 엄지처럼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모든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일는지 모른다. 우리 세대가 학교 담장 밑의 피노키오 인형처럼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온기를 가진 사람을 만나 소통하고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경쟁적이고 피상적인 관계에 지친 청년들이 따뜻하게 서로 안아주고 격려하고 ‘네가 최고’라고 말해줄 수 있는 관계망을 만들어가고 싶다.
글 김성수, 그림 김성수·오정희
▶ ‘도르리’는 음식을 차례로 돌려가며 내어 함께 먹거나 어떤 것을 똑같이 골고루 나누는 일을 뜻합니다. ‘창작집단 도르리’는 인천 동구 만석동
기차길옆작은학교에서 자라거나 활동해온 이모·삼촌의 창작 공동체입니다. 김성수·오정희·유동훈 세 사람이 함께합니다. 그들은 예술활동을 통해 ‘가난하면 행복하지 않다’는 편견을 무너뜨리길 꿈꿉니다. ‘도르리의 골목 도르리’는 그림, 만화, 인형 등으로 우리가 사는 동네와 골목, 사람, 세상을 격주로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