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과 농성장에 노동자들을 두고 나오다가 다시 한번 뒤를 돌아다보았다. 곧 추위가 닥칠 굴뚝을 따뜻한 빛으로 감싸주고 싶었다.
11월1일 새벽, 잠을 설치다 옥상으로 올라갔다. 오래전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무대가 되었던 만석동과 화수동의 공장 굴뚝들이 어둠 속에서도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날은 파인텍 홍기탁·박준호 두 해고노동자가 굴뚝에 올라간 지 355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이미 408일이라는 최장기 고공농성을 했던 차광호 아저씨가 동료 홍기탁·박준호 아저씨를 다시 굴뚝 위로 올려보낼 수밖에 없었던 1년 전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1일 오후 서울 양천구 신목동역으로 갔다. 2번 출구 계단에 올라서자마자 열병합발전소의 거대한 굴뚝이 보였다. 차들이 무심한 듯 빠르게 지나갔다. 그 찻길 옆으로 작은 농성천막이 보였다. 차광호 아저씨와 조정기·김옥배 아저씨가 마침 홍기탁·박준호 아저씨에게 밥을 올려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75m 아래까지 길게 늘어뜨린 줄에 빨간 가방을 매달아 당기면 굴뚝의 아저씨들이 줄을 잡아당겨 가방을 올렸다. 말 그대로 밥줄이었다. 권력과 자본의 매정한 돈줄이 아니라 동료의 따뜻한 마음과 뜨거운 사랑이 담긴 소통의 밥줄이었다. 힘겨운 싸움을 10년 넘게 해온 동료들이 서로를 지키는 생명줄이었다.
차광호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첫 직장이 떠올랐다. 140만원밖에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주말도 없이 일주일 내내 야근을 했다. 일을 하는 동안 문득문득 청계천 봉제노동자들의 미싱이 모니터와 마우스로 바뀌었을 뿐 노동자들의 현실은 바뀐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여를 버티다 회사에 항의 한번 못하고 이직을 했다.
그 무렵 인천 송도에 있는 한 절에 올랐다. 그곳엔 일정한 거처 없이 긴 막대기에 바랑 하나 메고 다니며 어려운 중생을 돌봤다던 미륵보살의 화신, 포대화상이 황금에 갇혀 있었다. 황금빛 불상 뒤로는 신도시의 고층아파트와 빌딩이 빽빽했다. 그 꼭대기마다 더 부자가 되고 더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의 무대가 된 만석동의 공장 굴뚝. 집을 빼앗긴 난장이 아버지는 이곳(일제강점기 군수공장이었던 조선기계제작소 굴뚝)을 모델로 삼은 굴뚝에 올라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지금은 철거됐다. 돌에 인화.
태풍이 지나간 여름날 저녁 서울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에서 홍기탁·박준호씨가 휴대전화를 쥔 손을 뻗어 굴뚝 아래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돌에 인화.
홍기탁·박준호 아저씨가 올라가 있는 굴뚝 위의 꿈은 더 많은 돈과 더 큰 권력이 아니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세상,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세상이었다.
굴뚝과 농성장에 아저씨들을 두고 나오다가 다시 한번 뒤를 돌아다보았다. 두 사람이 굴뚝에 오르던 1년 전처럼 농성장 주변의 가로수들이 갈색 이파리들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나는 곧 추위가 닥칠 그 굴뚝을 따뜻한 빛으로 감싸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빛은 나 혼자, 혹은 몇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굴뚝 위 두 노동자의 꿈을 우리가 잊지 않을 때, 그 굴뚝과 우리의 마음을 나눌 때, 굴뚝이 촛불처럼 우리를 밝혀줄 것이다.
글 김성수, 그림·사진 김성수 오정희 유동훈
▶ ‘도르리’는 음식을 차례로 돌려가며 내어 함께 먹거나 어떤 것을 똑같이 골고루 나누는 일을 뜻합니다. ‘
창작집단 도르리’는 인천 동구 만석동 기차길옆작은학교에서 자라거나 활동해온 이모·삼촌의 창작 공동체입니다. 김성수·오정희·유동훈 세 사람이 함께합니다. 그들은 예술활동을 통해 ‘가난하면 행복하지 않다’는 편견을 무너뜨리길 꿈꿉니다. ‘도르리의 골목도르리’는 그림, 만화, 인형 등으로 우리가 사는 동네와 골목, 사람, 세상을 격주로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