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단결’ ‘초일류’ ‘뿌리뽑자’ ‘썩은정치’…. 지난 반세기 대통령·국회의원 선거 구호로 쓰인 낡은 단어 조각들이 예술 퍼포먼스 소재로 새롭게 등장했다. 1970년대 유신 시절 대통령 선거 장소였던 장충체육관 앞 술판의 옛 현장도 생생한 설치 무대 작품으로 되살아났다.
다음달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국내 예술가 21팀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와 손잡고 꾸린 사상 초유의 ‘선거예술’ 프로젝트가 실체를 드러냈다. 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에서 선관위·미술관 공동주최로 오는 24일 시작하는 기획전 ‘새일꾼 1948-2020: 여러분의 대표를 뽑아 국회로 보내시오’전의 현장이다. 1948년 제헌선거부터 이번 총선까지 국내 선거 73년 역사를 소재 삼은 신작들을 선보이는 난장의 개막을 앞두고 미술관 쪽은 17일 전시장을 취재진에 내보였다.
1956년 대통령 선거 당시 야당인 민주당의 벽보. 유명한 선거구호인 ‘못살겠다 갈아보자’가 눈에 띈다.
‘새일꾼…’은 ‘아카이브형 사회극’을 플랫폼으로 작품·사료들을 풀어낸 전시마당이다. 해방 뒤 처음 치러진 1948년 5·10 제헌의원 선거부터 2000년대까지 명멸한 다채로운 선거사 자료들이 이를 소재 삼은 작가들의 신작과 뒤섞여 등장한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가 선명한 1956년 신익희 야당후보의 대선 포스터, 1971년 대선 당시 박정희·김대중 선거홍보물, 1987년 대선 당시 부정투표함으로 지목돼 30년 만에 개함이 이뤄졌던 구로구을 투표함 등 기억에 선연한 선거사 관련 유물과 역대 홍보물, 신문기사 등 아카이브 자료 300여점이 곳곳에 배치돼 있다. 이런 사료들을 토대로 작가들은 설치, 퍼포먼스, 드라마, 게임, 음악 등 장르에 다기한 상상력을 불어넣은 선거 예술품들을 내놓았다. 이날 취재진의 눈길이 집중된 작품은 3층에 나온 사회디자인 그룹 ‘일상의 실천’의 관객 참여 퍼포먼스 설치물 <이상국가: 유토피아>였다. 등사판 프레스 인쇄 기기로 역대 대선 후보자들 포스터에서 추려낸 단어목판 4000개를 조합해 가상 포스터를 찍는 체험을 할 수 있게 했다.
조주현 학예실장은 “공허한 과거의 구호단어들이 실물조각들로 나왔는데, 아무리 단어를 조합해도 어색하고 우스꽝스런 문장이 되는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된다”고 했다. 유신시대 ‘체육관 선거’가 이뤄졌던 장충체육관과 ‘막걸리 선거’가 자행됐던 인근 유세장 술판을 재현한 정윤선 작가의 설치작품 <광화문체육관-부정의 추억>은 전시장 창문 넘어 보이는 광화문 광장의 집회공간 풍경과 미묘하게 오버랩된다. 사회의 소수자들인 난민, 외국인노동자, 성전환자, 미혼모, 게이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상상을 독특한 형상의 조형물로 담은 최하늘 작가의 <한국몽>과 북극곰이 기표소에 들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해 선거에 참여하지 못하는 비인간 생명체들의 권리를 일러주는 작가·사회운동가 컬렉티브 그룹 ‘이동시’의 설치작품 <동물은 어떻게 투표하는가>, 네컷만화 ‘OOO’로 알려진 정세원 작가가 역대 선거를 풍자한 그래픽 일러스트 이미지 등도 눈길을 붙잡는 출품작들이다.
진보적인 사회디자인 그룹 ‘일상의 실천’이 제작한 관객 참여 설치작품 <이상국가: 유토피아>. 포스터를 인쇄하는 레터프레스 기기로 역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들의 포스터에서 추려낸 단어 4천개를 관객들이 선별·조합해 포스터를 찍어내는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조주현 학예실장은 “관객이 아무리 단어를 조합해도 완벽하지 않고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문장이 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노형석 기자
네컷만화 ‘OOO’로 알려진 정세원 작가의 그래픽 이미지 작품. 과거 유신 시대의 체육관 대통령선거를 일러스트풍으로 그려 풍자했다. 노형석 기자
예술가들이 대형 정치 행사와 결합한 집단 프로젝트를 꾸린 건 국내 문화판에서 사상 처음 벌이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투표 행위가 개인의 일상부터 국가의 운명까지 어떻게 바꾸면서 역사의 드라마를 펼쳐왔는지를 작가들의 상상력을 통해 색다르게 살펴보자는 취지라는 게 미술관 쪽의 설명이다.
전시기간 중에는 아카이브와 출품작들 말고도 소수자 계층을 위한 토론 무대, 가상 선거 운동, 유세 퍼포먼스 등이 펼쳐지게 된다. 특히 매주마다 청년세대의 관심사와 연관된 이슈들을 다루며 운영될 ‘위클리 보트’(주간투표) 이벤트가 눈길을 끌 것으로 보인다. 미술관 쪽은 이를 위해 내부 공간에서 사회·정치적 사안과 일상 관심거리들에 대한 ‘입법극장’을 시연하고 관객 투표와 개표 이벤트까지 진행할 참이다.
아울러 밀레니얼 세대 전자음악가들과 협업해 ‘미래세대 유권자들에게 들려주는 노래’를 짓고 컴필레이션 음원과 엘피(LP) 음반으로 제작한다는 계획도 세워놓았다.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일민미술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