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재개발’을 부른 가수 유산슬(유재석).
‘찐이야’ 대 ‘사랑의 재개발’, 승자는?
제21대 국회의원선거 로고송으로 유산슬의 ‘사랑의 재개발’이 1위를 할 거란 예상이 많았다. 방송인 유재석이 트로트 신인가수 ‘역할 놀이’를 한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촉발된 트로트 열풍이 온 나라를 뒤덮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선거운동 기간에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로고송은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터트롯> 출신 영탁의 ‘찐이야’인 것으로 전해진다. 선거 로고송 제작 1위 업체인 도너츠엔터테인먼트의 김재곤 대표는 “후보자들이 ‘찐이야’를 가장 많이 찾고, ‘한잔해’(박군)도 그 못지않다. 두 노래에 견주면 ‘사랑의 재개발’은 50~60%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런 차이는 노랫말에서 비롯된다. “싹 다 갈아엎어 주세요”로 시작하는 ‘사랑의 재개발’은 야당 선거구호와 맞아떨어진다. 여당은 “싹 다 1번 찍어주세요”로 바꿔 사용하고 있지만, 개운치만은 않다. 여당 후보 선거캠프의 한 관계자는 “개사를 해도 사람들은 자연스레 원래 노랫말을 떠올리기 때문에 현장에선 많이 쓰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여당은 대신 “한잔해 한잔해 한잔해” 하는 대목에 후보자 이름을 넣기 좋은 ‘한잔해’를 애용한다. 미래통합당 등 야당에선 진심, 진정성 등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찐이야’를 가장 많이 쓰고 있다. 정의당은 응원가풍의 ‘질풍가도’를 많이 쓴다.
이전에 인기였던 선거 로고송을 봐도 비슷한 특징을 보인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음저협)의 한준호 홍보팀장은 “2018년 지방선거 당시 홍진영의 ‘엄지척’, 박상철의 ‘무조건’, 박구윤의 ‘뿐이고’ 등이 상위권이었다”고 밝혔다. 이들 노래는 선거 메시지와 연결하기 좋은 세 글자 제목의 트로트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트로트 매니지먼트 일을 7~8년 한 최진석 대표는 “트로트계에선 어르신들이 쉽게 외울 수 있도록 세 글자 제목을 선호하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또 일부러 선거 로고송을 염두에 두고 작사하는 경향도 있다”고 말했다.
요즘은 트르트가 선거 로고송의 대세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선거 로고송 역사에는 우리 사회의 변화가 담겨 있다. 국내 첫 선거 로고송으로 1960년 대통령선거 당시 야당 지지자들이 부른 ‘유정천리’ 개사곡을 꼽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이영미 문화평론가는 “‘유정천리’는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이 부른 운동가요로 봐야 한다. 3·15 부정선거와 맞물려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데 있어 도화선이 된 노래”라고 설명했다. 이어 “과거엔 엄숙한 선거판에서 노래한다는 건 금기시되는 분위기여서 선거 로고송 개념이 없었다”고 말했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대통령직선제가 부활하면서 선거에 노래를 활용하는 시도가 생겨났다. 민주화 항쟁 참여 시민들이 개사한 노래를 많이 부르던 분위기를 이어가고자 한 것이다. 당시 김영삼 후보는 “군~정 종~식 김영삼, 민~주 통~일 김영삼”이라는 ‘군정종식가’를 내세웠고, 김대중 후보는 동요 ‘자전거’를 “따르릉 따르릉 어서 오세요, 김대중이 왔습니다”라고 개사한 노래를 활용했다. 노태우 후보의 ‘베사메무초’도 화제가 됐는데, 이는 ‘보통 사람’ 이미지를 강조하고자 애창곡을 부른 것이어서 선거 로고송으로 보긴 힘들다.
선거 로고송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건 1995년 지방선거부터 확성기 사용이 가능해지면서다.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는 디제이 디오시의 댄스곡 ‘디오시와 춤을’을 ‘디제이와 춤을’로 개사한 노래로 큰 인기를 끌었다. 발랄한 선거 로고송으로 젊은 층을 사로잡고 기존의 강성 이미지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결국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다. 2000년 국회의원선거 때는 부패·반개혁 정치인들을 국회에서 몰아내자는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이 펼쳐지면서 이정현의 댄스곡 ‘바꿔’가 큰 화제를 모았다.
경기 파주 지역 시민들이 지난 6일 오후 금릉역 앞 중앙광장에서 한 정당 선거대책위원장의 연설을 들으며 박수치고 있다. 파주/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하지만 이후 선거에선 이렇다 할 거대 의제가 사라지면서 선거 로고송도 특정 메시지를 담기보다는 흥겹고 뇌리에 쏙쏙 박히는 노래를 선호하게 됐다. 그러면서 떠오른 게 트로트다. 쉽고 단순한 멜로디에 개사가 쉽고 전 연령층을 아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거리 유세에 모이는 이들이 거의 중노년층인 까닭도 있다.
지역이나 정당별로 선호곡이 달라지는 특징도 나타났다. 도너츠엔터테인먼트의 김 대표는 “전라도에선 ‘진또배기’ ‘뱃노래’ 등 민요를 바탕으로 한 노래가 인기고, 경상도에선 ‘승리를 위하여’ 같은 응원가나 ‘무조건’처럼 센 노래가 인기”라고 귀띔했다. 또 “보수 정당은 ‘아 대한민국’처럼 거룩하고 기품 있는 곡을 좋아하고, 진보 정당은 트렌디하고 기발하며 재밌는 곡을 선호한다”고 덧붙였다.
인기 있다고 아무 노래나 선거 로고송으로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저작권자인 작사·작곡가의 동의를 얻은 뒤 음저협 승인을 받아야 쓸 수 있다. 저작권자 동의를 얻으려면 저작인격권료를 내야 하는데, 부르는 게 값이다. 평균 100만 원 선이라고 한다. 음저협 승인을 받으려면 복제권료를 내야 하는데, 선거 유형별로 가격이 정해져 있다. 대선과 국회의원선거 정당용은 곡당 200만원, 국회의원선거 후보자용은 50만원 하는 식이다. 여기에 곡당 70만원가량의 음원 제작비가 들어간다. 이번 선거 후보자가 로고송 1곡을 만들 경우 평균 220만원이 들어가는 셈이다. 저작인격권료로 거액을 제시해도 저작권자가 반대하면 쓸 수 없다. 여야 모두 유산슬의 ‘합정역 5번 출구’에 러브콜을 보냈지만, 공동 작사가로 이름을 올린 유재석의 반대로 쓰지 못했다. 원더걸스의 ‘텔 미’도 저작권자인 박진영이 선거 로고송 사용을 거부한 대표적 사례다.
이번에는 코로나19 사태로 선거 로고송 사용이 줄어든 분위기다. 하지만 실제 승인 건수는 이전 선거 때와 비슷하다. 음저협은 12일 현재 696건(1100여곡)의 선거 로고송 사용 승인을 했다고 밝혔다. 2016년 국회의원선거 당시 644건(1200여곡)과 비슷한 수준이다. 다만 갈수록 선거 로고송의 비중이 줄어들 것으로 보는 의견도 나온다. 이영미 평론가는 “거리 홍보가 중요하던 시절에는 선거 로고송의 효과가 컸지만, 이제는 후보자 정보를 전하는 다른 통로들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며 “선거 로고송을 만들더라도 유튜브 등 새로운 플랫폼을 활용하거나 노무현 후보가 ‘상록수’를 불렀던 것처럼 감성에 호소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