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2월 개표부정 시비로 29년 동안 개함되지 않고 보존됐던 서울 구로을 지역구 우편투표함.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군데군데 녹이 슬고 찌그러진 모습과 뚜껑에 새겨진 글자 등이 1987년 개표부정 시비 당시의 곡절을 보여준다.
‘부정근거 구로1동’
녹슨 연녹색 철제 투표함 뚜껑 위에 큼지막한 글귀가 적혀 있다. 33년 전 누군가 휘갈겨 쓴 글자들은 절박한 기운을 내뿜었다. ‘어떻게든 함을 지켜야 한다’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야 한다’는 무언의 호소가 울려 나오는 듯한 필체는 강렬했다.
그 글자 적힌 투표함이 유물이 돼 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에 들어와 있다. 지난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구로구청 항쟁’으로 불리는 개표부정 시비에 휩싸여 29년간 개함되지 않았던 서울 구로을구 우편투표함이다. 33년 전 기약 없이 잠겼다가 4년 전 봉인이 풀려 안식을 얻게 된 투표함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수원 연수시설 소장품이 됐다. 지난달 개막한 선관위와 미술관의 공동기획전 ‘새 일꾼 1948~2020’의 대표 유물로 찾아와 역사의 변화를 실감케 하고 있다.
구로을 우편투표함을 역사적 유산으로 만든 사건은 대선 투표일인 1987년 12월16일 오전 일어났다. 우편투표함을 먼저 개표장으로 옮기려던 선관위 직원들의 작업을 부정행위로 의심한 시민들과 공정선거감시단원들이 함을 빼앗아 농성을 시작했다. 이튿날 새벽, 구청의 옥상과 사무실에서 개표함을 지키려던 학생·시민과 수거하려는 경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200여명의 구속자를 낸 ‘구로구청 항쟁’이다. 2016년 한국정치학회가 주도해 함을 개봉하면서 살핀 결과 실질적인 부정행위는 없었고 오해였다는 결론이 났다. 하지만 당시 관권선거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이 응집돼 드러났고, 개표부정 시비에 사실상 마침표가 찍혔다는 점에서 구로을 개표함 사건이 남긴 정치사적 의미는 작지 않다.
사실 이 땅에서 투표함의 역사는 8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친일파 유지들 외엔 사실상 참정권이 없던 조선 민중은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 비로소 투표함의 효용을 알게 된다. 당시 공보부가 붙였던 포스터를 보면, 한반도 지도 중앙에 투표함을 그려 넣고 “이 상자에 드러가는 투표가 우리의 장래 정부를 결정한다”는 구호를 넣어 투표함의 중요성을 알린 대목이 눈에 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 포스터. “이 상자에 드러가는 투표가 우리의 장래 정부를 결정한다”는 구호를 넣어 투표함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이 눈에 띈다.
그러나 정부 수립 뒤 40여년간 투표함은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무수히 해코지를 당한다. 궤짝 같은 나무함이 쓰였던 60년대 초반과 철제함이 주종이었던 70년대, 여당은 경찰의 호위 아래 투표시간도 되기 전에 투표장에 잠입해 함을 열어젖히고 여당 표를 집어넣는 노골적인 술수를 썼다. 투표자 수보다 찬성자 수가 많다고 생각되면 다시 함을 열어 용지를 꺼내고 일부를 불태우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1960년 4월혁명도, 3·15 부정선거 당시 사전에 몰래 집어넣은 여당 표를 투표함에서 무더기로 발견한 마산의 야당, 시민, 학생들의 항의가 도화선이 됐다. 무거운 철제함이 1991년까지 애용된 것도 수시로 함을 갈라 표를 바꿔치기해 폭력사태의 원인이 됐던 투표함의 수난사가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투표지를 투표함에 넣는 근대 선거제도는 1인1표 비밀투표 원칙을 세운 18세기 프랑스혁명에 뿌리를 뒀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투표함 전통이 있었다. 배심원이나 행정관, 추방할 독재자 등을 정할 때 키스타 등의 큰 항아리를 투표함 삼아 도기 조각이나 원반형 표를 넣었다. 키스타는 원래 성스러운 물건이나 지혜의 상징인 뱀이 들어간 용기를 뜻했다. 서구의 근대 투표함 제도의 이면에는 키스타에 깃든, 공동체를 위한 신성하고 조화로운 선택을 갈망하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총선에서 제 몫을 다할 투표함에도 키스타의 축복이 깃들길 기원한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