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이드웨이>(Sideways, 2004)에서 와인 애호가인 영어교사 마일즈는 이혼의 아픔을 포도주로 달래는 남자다. 평소에는 의기소침하고 무미건조한 삶을 살지만, 와인을 마실 때면 삶의 활력을 찾는다. 그는 1961년산 보르도의 샤토 슈발 블랑을 애지중지한다. 슈발 블랑은 2016년 빈티지 기준으로 120원만대의 고급 와인이다. 마일즈는 이 와인을 10주년 결혼기념일에 마시려고 아껴뒀고, 이혼 뒤에도 전처와의 재결합을 기다리며 아꼈다. 자신에게 호감을 보인 여성이 마시자고 할 때도 거절했다. 그러나 재혼한 전처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는 혼자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햄버거와 함께 일회용 컵에 슈발 블랑을 따라 마신다. <사이드웨이>는 여러모로 훌륭한 영화지만, 슈발 블랑을 일회용 컵에 따라 마시는 충격적(?) 결말 때문에 내겐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아니, 어떻게 슈발 블랑을 종이컵에 따라 먹냐고!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무리 좋은 와인도 어떤 상황에서 누구랑 함께 마시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었겠지만.
와인 잔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크기와 모양이 다 다른 건 이유가 있어서다. 마시기에 적정한 온도, 와인과 혀가 닿는 위치, 향을 품는 기능 등을 고려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와인 잔은 크게 보르도, 부르고뉴, 화이트, 스파클링, 디저트로 나눌 수 있고, 좀 더 깊이 들어가면 품종이나 산지별로 세분화된 잔들도 있다.
와인 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듯한 보르도 잔은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시라(시라즈)같이 바디감 있는 레드 와인에 적합하다. 반면 부르고뉴 잔은 보르도 잔에 비해 와인을 담는 공간인 볼이 훨씬 더 넓다. 피노 누아르처럼 상대적으로 섬세한 레드 와인에 적합하다. 화이트 잔은 레드 잔보다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다. 차게 마셔야 하니 와인 온도가 빨리 올라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스파클링 와인(샴페인) 잔은 볼 폭이 좁고 긴 형태인데, 찬 온도를 유지하면서 올라오는 기포를 오랫동안 보면서 즐기게 하기 위해서다. 위스키와 소주 잔이 작은 것처럼 당도와 알코올 도수가 높은 디저트 와인 잔은 더 작다.
물론 모든 종류의 와인 잔을 다 가질 필요는 없다. 일단은 부르고뉴 잔이나 보르도 잔 같은 큰 잔을 추천하고 싶다. 향을 잘 품어낼 수 있어서다. 그러다 더운 여름엔 와인 온도가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화이트 잔을 이용하는 방법도 좋겠다. 샴페인 같은 스파클링 와인의 기포를 보는 재미도 있기 때문에 스파클링 잔도 있으면 좋겠지만. 와인 잔은 향과 맛을 최대한 즐길 수 있도록 얇고 투명하게 만들어졌다. 대체로 와인 잔의 두께는 2㎜ 안팎으로 아주 얇아서 실수로 깨버리기도 쉽다. 그래서 리델 블랙타이나 잘토 같은 고가의 와인 잔을 깨버리면 눈물이 날 정도다. 슈피겔라우나 쇼트츠비젤(쇼트즈위젤), 가브리엘도 ‘가성비’ 좋은 와인 잔이니 이런 잔 한두개만 갖춰도 좋다.
그냥 종이컵이나 머그컵에 마시면 안 되냐고 묻는다면 직접 실험을 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아예 다른 와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차이가 나니까. 그저 멋을 내기 위해서 와인 잔을 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와인 잔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한겨레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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