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달>에서 상국 아빠를 연기한 박경순(맨 오른쪽). 허황한 꿈을 안고 한탕을 노리며 사는 사람들 틈에서 가장 성실하게 살던 상국네는 결국 아파트를 분양받고 달동네를 떠난다. 프로그램 갈무리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 꼭지에 절대 소개할 수 없을 것 같은 드라마 <펜트하우스>(에스비에스)를 보면서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자신이 괴물처럼 키운 딸 천서진(김소연)에게 결국 끔찍한 최후를 맞는 천명수(정성모)다. 천명수를 연기한 배우 이름은 정성모지만, ‘토요명작 리플레이’ 애독자들에게선 이런 반응도 나온다. “아이고 우리 종도, 태수 그렇게 괴롭히더니 결국 벌받네, 벌받아.” 왜 종도냐고? 그는 이 꼭지에서 소개한 작품 중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던 <모래시계>(1995)에서 악역 이종도를 연기했다. <모래시계>가 소개된 이후 “요즘 정성모가 뭐 하는지 궁금하다. 인터뷰 한번 해달라”는 요청이 많았는데, 때마침 그가 <펜트하우스>에 등장했다.
“그동안 뭐 하셨어요?”라고 묻기에도 미안한 게, 알고 보면 그는 꾸준히 드라마에 출연했다. 1982년 <문화방송> 15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거의 한 해도 쉬지 않았다. <모래시계> 이후 2002년 <장희빈>에서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 2008년 <바람의 나라>에서 권모술수에 능한 배극, 2010년 <제빵왕 김탁구>에서 구일중의 오른팔인 비서실장, 2019년엔 <너의 노래를 들려줘>에서 주인공의 아버지 역할로도 등장했다. 드라마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악역이나 선 굵은 인물뿐만 아니라 청춘물의 자상한 아버지까지 다양한 역할로 늘 우리 곁에 있었다. <펜트하우스>에서 오랜만에 이종도를 뛰어넘는 악역으로 나오니 사람들은 자연스레 <모래시계>의 이종도를 떠올린다. 그렇다. 정성모 하면 뭐니 뭐니 해도 이종도다!
<모래시계>에서 이종도 역을 한 정성모. 에스비에스 제공
종도, 상국 아빠, 정혜…조연의 가치
예전 드라마를 언제, 어디서든 다시 볼 수 있는 오티티(OTT) 시대가 도래하면서 명작이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토요명작 리플레이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덩달아 정성모처럼 연기 잘하는 ‘조연배우’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이모, 삼촌, 부모 캐릭터는 무턱대고 빼버리는 요즘과는 달리 과거엔 역할 하나하나를 다 신중하고 소중하게 다뤘다. 한 드라마 피디는 “2000년대 초·중반 이후 한류 열풍이 불면서 주연배우의 몸값이 높아졌고, 드라마가 잘 안되거나 제작비를 줄여야 하는 상황이 되면 일단 조·단역부터 빼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의 달>, <모래시계>처럼 수많은 사람이 주역처럼 활약하는 드라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토요명작 리플레이를 통해 소개된 뒤 많은 이들이 반가워했던 또 다른 이가 <서울의 달>에서 상국 아빠를 연기한 박경순이다. 허황한 꿈을 안고 한탕을 노리며 사는 사람들 틈에서 가장 성실하게 살던 상국네는 결국 아파트를 분양받고 달동네를 떠난다. 진실하게 살면 복받는다는 그 시대, 아니 지금 우리 시대에도 희망의 존재 같은 인물이었다. 포털사이트 인물 소개에도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세월이 흘렀지만, 박경순은 성실한 연기로 몰입도를 높였다. <서울의 달> 김운경 작가는 “그런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이후에도 더 많이 활약했어야 하는데 아쉽다”고 말했다. 그래도 그를 기억하는 팬들은 많다. 네이버 ‘대하사극 매니아 카페’에선 그가 출연한 작품을 모은 ‘박경순 시리즈’라는 게시물도 찾아볼 수 있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서 상철-정혜 부부를 연기한 차철순과 김숙경도 팬들이 근황을 궁금해하는 배우다. 최수종과 더불어 1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빠짐없이 등장했다. 상철과 정혜는 극에서 친구들이 시험공부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최재성이 연기한 찬우가 진로를 고민할 때 옆에서 큰 힘이 되어줬다. 운군일 피디는 “상철 역할은 큰형 같은, 정혜 역할은 진짜 의대생처럼 똑 부러지는 이미지의 배우를 찾았다”고 말했다. 김숙경은 요즘 시청자들에게 <응답하라 1988>의 류혜영과 닮은 모습으로도 회자하고 있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 출연했던 최재성은 “이 꼭지를 통해 예전 드라마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도 잊고 있던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더라”며 “언젠간 다 같이 만나 진하게 한잔하면서 옛 추억을 이야기하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했다.
남성훈·여운계…잊히지 않는 사람들
예전 드라마를 다시보기 하면서 지금은 스타가 됐지만 당시엔 신인이거나 덜 유명했던 배우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네 멋대로 해라>에는 이나영이 활동하는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김재욱이 출연했고, 보컬로 전혜진이 등장했다. <서울의 달>에서는 연기파 배우 김해숙과 나문희, <모래시계>에서는 최민수를 형님으로 모시는 역할로 앳된 손현주를 만날 수 있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의 손지창·하희라·신애라는 물론이고, <순풍산부인과>에선 화제를 모았던 고교생 시절의 송혜교, <펜트하우스>에서 ‘우리의 종도’를 죽여버린 김소연 등 여러 배우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서 하희라는 최수종을 좋아하는 의대 후배로 잠시 나온다. 최수종은 “당시에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는데, 두 사람이 부부가 된 지금 다시 보는 그 장면은 남다르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순풍산부인과>를 보며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게 했던 배우는 장진영(1972~2009년)이다. 그는 이 드라마에서 오지명이 운영하는 순풍산부인과의 간호사로 나온다. 표 간호사와 남들은 다 알지만 둘만 모르는 비밀 연애를 하는데, 친척이 병원 개업을 하며 떠나게 된다. 오티티는 연기 잘하는 배우를 잊히지 않게 해주는 추억의 앨범 같은 역할도 하는 걸까. <청춘의 덫>에는 여운계(1940~2009년)가 심은하의 할머니로 나오고, <모래시계>에는 남성훈(1945~2002년)이 태수를 대부로 키우는 장도식으로, 조경환(1945~2012년)이 박상원을 돕는 검사장으로 등장해 굵직하게 중심을 잡으며 극을 이끈다. <모래시계> 박상원은 “당시 연기 잘하는 좋은 배우가 참 많았다”며 “드라마를 통해 그들을 잊지 않고, 또 요즘 세대가 그들을 알게 되는 것도 고마운 일”이라고 말했다.
달라진 인권의식…옛 드라마로 깨닫는 변화
지금의 시선에서 옛 드라마를 다시 보면, 같은 장면도 다르게 해석되는 이채로운 경험도 하게 된다. 과거 드라마에는 온 가족이 모여 밥 먹는 장면이 꽤 많이 등장한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 최수종은 “아마 그 시절 그런 따뜻한 정이 그리워 드라마를 다시 보는 분도 많을 것 같다”고 했다. 갈수록 팍팍해져가는 시대에 대한 방증인 걸까.
반대로 촬영 환경과 인권 감수성 등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반갑다. 옛 드라마에는 배우들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꽤 많다. <네 멋대로 해라>에선 인디밴드 키보디스트인 여자 주인공이 줄곧 담배를 피우며 등장한다. 박성수 피디는 “당시는 홍대와 인디밴드라는 게 젊음의 상징이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2002~2004년 티브이에서 흡연 장면이 금지된 이후 드라마에선 흡연 장면이 아예 사라졌다. 주 52시간 시대가 되면서 생방송처럼 흘러가던 촬영 환경이 바뀐 것은 물론이고, 인권이나 성인지 감수성 등의 변화도 눈에 띈다. <순풍산부인과>를 연출한 김병욱 피디는 “미달이 출연 분량이 많다 보니 늦게까지 촬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도 너무 미안했고 지금까지도 미안한 부분이다”라고 했다. 최근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 출연 아동·청소년의 권익 보호를 위한 표준제작 가이드라인’을 마련했고, 이를 새해 1월18일부터 시행한다.
<순풍산부인과>에 출연한 송혜교(왼쪽부터), 김소연, 선우용녀. 에스비에스 제공
토요명작 리플레이는 작품 전편을 다시보기한 다음, 작가·피디 혹은 배우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는 순서로 기사를 준비한다. 주로 1980년~2000년대 초반 작품이 많은데, 당시만 해도 한 작품을 깊게 다룬 기획기사가 없어 토요명작 리플레이가 드라마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평가를 받아 다행스럽다. 가장 힘들었던 작품은 <서울의 달>이었다. 무려 81회. 하지만 한편 한편 다시 보며 공통으로 느낀 장점은 작가들의 필력이다. <서울의 달> 김운경 작가는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라 일일이 손으로 대본을 썼다는데, 그 많은 분량을 어떻게 혼자 소화했는지 존경스럽다. 20여년간 시트콤을 지켜온 김병욱 피디는 또 어떻고.
들여다보면 시대를 주름잡던 이는 사실 몇 되지 않는다. 우리가 명작으로 꼽는 <서울의 달>, <옥이 이모> 등은 모두 김운경 작가가 썼다. <맛있는 청혼>, <나는 달린다>, <네 멋대로 해라>는 모두 박성수 피디, <고교생일기>와 <사랑이 꽃피는 나무>는 운군일 피디 작품이다. 달리 생각하면 명작이 등장한 이유가 보인다. 방송사가 몇개밖에 없던 시절, 드라마 집필의 기회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모두 방송사 극본 공모로 데뷔해 1년 가까이 인턴 기간을 거치며 단편으로 필력을 쌓아 어떤 경지에 올랐을 때에야 긴 호흡의 장편을 썼다. 편성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그중 재미있고 성공 가능성이 높은 드라마를 우선 선정했던 것이다.
요즘 시청자들이 오티티로 다시 보며 근황을 궁금해 하는 두 사람. <사랑이 꽃피는 나무>의 김숙경(왼쪽)과 차철순. 프로그램 갈무리
전문가들은 당시의 명작에서 ‘요즘의 풍요 속 빈곤’이 보인다고 한다. 티브이뿐 아니라 오티티 등 플랫폼이 늘면서 작가에게 기회는 많아졌지만, 필요한 작품 수가 늘어남에 따라 다소 아쉬운 작품도 많아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과거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대본, 연출, 연기 외에는 없다. 화려한 컴퓨터그래픽도, 무대장치도 없이 오로지 ‘세 가지 기본 요소’만으로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결국 기본에 충실한 뼈대가 명작을 낳는 셈이다.
토요명작 리플레이에 소개한 드라마에 나온 주인공들은 지금도 끝없이 또 다른 명작을 위해 나아가고 있다. <모래시계> 박상원은 최근 <콘트라바스>라는 연극을 마쳤고, 김운경 작가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한 여인의 삶을 그린 드라마를 집필 중이고, 김병욱 피디는 주식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를 쓰고 있다. 박성수 피디는 제작사 대표로 새로운 명작을 빚어내는 중이다. 그들의 또 다른 명작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기자도 더 다양한 명작 리플레이로 찾아오겠다. ‘올디스 벗 구디스(구관이 명관)!’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 <한겨레> 문화부 기자. 언제든 옛날 콘텐츠를 다시 볼 수 있는 시대. 세대 불문 되감기하면 좋을 대중문화 작품을 소개하려 한다. 연출, 연기, 이야기 기본 3박자에 충실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옛 작품들이 콘텐츠의 본질을 일깨운다. 지금 시선에서 새 해석이 등장할지도. 제작진과 배우들의 비하인드 코멘터리도 담아보겠다. 3주에 한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