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줄 알았던 박마리(심은하)는 8년 뒤 의사 김주리(심은하)가 되어 돌아온다. 주리는 눈이 녹색이 되면 제3의 인격 엠(심은하)이 표출된다. 주리가 엠이 되어 병원에서 난동 피우는 자를 제압하는 장면. 프로그램 갈무리
▶ <한겨레> 문화부 기자. 언제든 옛날 콘텐츠를 다시 볼 수 있는 시대. 세대불문 되감기하면 좋을 대중문화 작품을 소개하려 한다. 연출, 연기, 이야기 기본 3박자에 충실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옛 작품들이 콘텐츠의 본질을 일깨운다. 지금 시선에서 새 해석이 등장할지도. 제작진과 배우들의 비하인드 코멘터리도 담아보겠다. 3주에 한번 연재.
“아~ 아아~ 아아아아~ 아~ 아아~ 아아아아~ 아~ 아아~ 아아아아아~♬” 자, ‘슬프도록 무서운’이 흐르면 이불을 뒤집어쓸 타이밍이다. 지금 ‘그’가 누군가한테 아주 잔인한 짓을 할 작정이기 때문이다. ‘그’의 눈이 혹시 녹색으로 변했나? 그렇다면 확실하다.
1회 최재민(이영후) 박사에 따르면 그는 건장한 사내 셋을 종이처럼 찢어놓았을 정도로 광폭한 괴력의 소유자다. 성인 남자를 10미터 밖으로 던져버리기도 했다. 대체 ‘그’의 정체가 뭐니? “당신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내가 돌아왔어. 나는 엠… 당신들은 내 몸뚱이를 갈가리 찢어놨어. 이젠 당신들 차례야. 몸뚱이가 갈가리 찢겨나가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맛보게 해주겠어.”(6회) 아아아아악!
“임산부나 노약자는 시청을 삼가시기 바란다”는 주의성 자막(7회)까지 등장했던 드라마, 바로 <엠>(M)이다. 1994년 8월1일부터 30일까지 총 10부작으로 <문화방송>(MBC)에서 방영한 국내 최초 에스에프(SF) 스릴러 드라마다.
여름 납량특집 하면 <전설의 고향> 같은 귀신 이야기 정도였던 시절에, 낙태된 아이의 기억분자라는 사회적+과학적 소재를 접목해 다중인격 주인공을 등장시켰다. 염력이라는 초능력에, 전염성 괴질 등 월·화요일 밤마다 우리를 오들오들 떨게 만들었다.
엠과 키스하면 전염성 괴질에 걸린다.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등 지금 시선에서 생각해볼 요소들이 많다. 프로그램 갈무리
<엠>을 집필한 이홍구 작가는 13일 <한겨레>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우여곡절 끝에 <엠>을 낳았다”고 말했다. “문화방송 드라마국에서 <에스비에스>(SBS)가 8월에 김수현 작가와 작품을 한다며 대적할 만한 걸 준비하라더라고요. 당시 백전백승의 김 작가를 어떻게 이겨요. 그래서 타깃층이 다른, 남자 시청자가 좋아할 만한 주먹 세계 풍운아 이야기로 차별화하면 김 작가를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시청률은 어느 정도 나오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왔죠.”
하지만 그는 이기지 못한다면 파격적인 도전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평소 하고 싶었던 에스에프(SF) 장르를 제안했다. <x-수색대> 등 어린이 에스에프 드라마를 여러 편 성공시켰던 그는 어른용 에스에프물에 도전해보고 싶어서 평소 관련 자료를 모아두었다.
<엠> 시놉시스를 제출했더니 금방 피드백이 왔다. 재미있다고? “미쳤냐고요. 하하하. 이런 황당한 이야기는 방송할 수 없다고 다들 고개를 저었죠.” 하지만 당시 최종수 담당 책임피디가 어차피 질 거라면 모험이라도 해보자며 적극적으로 추천해 <엠>은 우여곡절 끝에 탄생했다.
1회가 나간 다음날부터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평균 시청률 38.6%. 마지막 회 자체 최고 시청률 52.5%는 한국 드라마 역대 순위 20위(회당 기준)에 올라 있다. 김수현 작가의 <작별>을 이긴 것은 물론, 1994년 방영작 중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냈다.
이홍구 작가는 “1회가 나가자마자 연장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라고 회상했다. 그때는 8부작 미니시리즈가 있었다. <엠>도 8부작으로 시작했는데, 10회를 더 하자는 얘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특수분장, 컴퓨터그래픽(CG) 등 시간 걸리는 작업이 많아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대 2회만 늘려 10부작이 됐다. 18부까지 연장했다면 어떤 이야기가 더 나올 수 있었을까? 작가는 드라마 종영 이후 <엠>을 두 권의 소설로도 내놓았다.
<엠>은 심은하의 갖가지 매력을 담은 ‘스페셜 박스’같다. 방영 전 터진 스캔들이 1회가 나가자마자 연기력에 말이 쏙 들어갔다고 한다. 프로그램 갈무리
<엠>의 성공은 파격적인 내용과 독특한 음악, 특수효과 등 이전 드라마와 다른 새로운 요소들이 작가의 바람대로 젊은층을 사로잡은 덕이 크다. 특히 <엠>의 상징인 심은하의 녹색 눈동자는 색달랐다. 고등학생 박마리이자, 정신의학자 프롬 박사가 만든 새로운 인격인 김주리 안에서 세번째 인격 엠이 등장하는 순간 눈은 녹색이 된다.
이홍구 작가는 “<엠>은 한국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시지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당시 국내 티브이에서 적용하던 아날로그 촬영 방식의 동영상은 1초에 약 30장의 스틸컷이 지나갔다. 국내 방송사에만 있던 기계로 특수 영상 제작실 담당자가 스틸컷 한장 한장에 일일이 녹색 칠을 했다. 색채 작업만 약 사흘이 걸렸다.
이홍구 작가는 “대본을 쓸 때부터 녹색 눈동자를 생각했다. 원래는 심은하한테 컬러 렌즈를 착용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 할 수 없이 시지 작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효과는 더 강렬했다.
마리의 얼굴에 죽은 태아인 엠의 얼굴이 비치고, 마리의 배가 꿈틀대는 장면 등도 모두 시지로 처리했다. 기계가 낙후해 수술방에서 도구들이 염력으로 날아다니는 장면도 시지 작업이 안 돼 스태프들이 줄을 달고 흔들었을 정도로 열악했던 환경을 생각하면 놀라운 결과물이다.
<엠> 이후 시지가 화제를 모으며 고가의 장비를 도입하는 등 <문화방송> 시지실이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이홍구 작가는 “그래서 시지실에서 제대로 된 에스에프 드라마를 해보자고 제안해 작정하고 했던 게 이소라, 고소영 주연의 <별>이었다. 우주선도 나오고, 외계인도 등장시켰지만 실패했다. <엠> 이후 시지에 대한 시청자의 기대치가 한껏 높아졌다. 충족시키기가 쉽지 않았다”며 웃었다. 하지만 <엠>·<별>·<아르엔에이>(RNA) 등으로 이어진 그의 도전은 멜로, 홈드라마 등 한정적이었던 한국 드라마 장르의 다양화에 큰 역할을 했다. “변화를 줘보자”는 움직임이 관계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김은희(김지수)는 모두를 살리려고 자신을 원하는 엠을 찾아간다. 엠과 은희가 키스하는 듯한 동성애 코드는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다. 그런 은희를 말리려는 송지석(이창훈). 프로그램 갈무리
지금 <엠>을 다시 보면, 그때는 몰랐던, 앞선 지점이 많다. 지금껏 낙태 반대 드라마로만 생각했지만, 바이러스의 무서움을 27년 전에 먼저 경고했다는 게 코로나19 시대를 겪고 있는 지금 시대에 새롭게 보인다.
바이러스 숙주인 엠은 키스를 통해 에볼라 출혈열 바이러스를 사람에게 감염시킨다. 최초의 감염자인 산부인과 의사 박운철(이동신)은 피부가 녹아내리며 흉측한 모습으로 변한다. 그때는 병실에 격리되어 누워 있는 환자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엠>처럼 치사율 높은 바이러스의 등장이 머잖은 것만 같아 이제는 두렵게 다가온다.
이홍구 작가는 전염병을 설정한 이유에 대해 “엠이 폭주하면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판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떠올렸다. 그때 당시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가 발생해 나라 인구의 절반이 사망했다. 7~8일 안에 사망할 정도로 치명적인데, 대비가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바이러스 한 방이 문명사회로 떨어지면 어떻게 될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6회에는 실제 이런 대사도 나온다. 엠은 프롬 박사를 감염시킨 뒤 “머잖아 인간은 멸종할 것이다. 핵이 아닌 바이러스에 의해 종말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대놓고 나오는 동성애 코드도 의외다. 태어날 때부터 마리 몸속에 있었던 다른 태아의 기억분자인 엠은 남자다. 그는 세상에서 둘도 없이 착한 김은희(김지수)를 사랑한다. 5회에서 자신을 찾아온 은희에게 엠은 마리인 척하면서 볼에 뽀뽀를 하고, 6회에서는 엠이라는 정체를 아예 드러내고 “내가 원하는 건 너”라며 키스를 시도한다. 9회에서도 엠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자신을 찾아온 은희에게 키스를 시도한다.
엠은 남자지만 연기하는 배우는 심은하다. 동성애 코드가 대놓고 드러난다. 요즘 같으면 삭제됐거나 간접적으로 표현됐을 장면이다. 지금 사회는 그때보다 발전했지만 방송은 퇴보한 것일까? 물으니 이홍구 작가가 재미있는 대답을 내놨다. “그때는 동성애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어서 누구도 지적하지 않아서 그대로 방송이 됐다. 그냥 키스신이 너무 많다는 얘기만 나왔다”고 말했다. “동성애적으로 보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꼭 필요한 장면이었다.”
<엠>은 심은하가 지금껏 출연한 모든 작품의 매력을 모아놓은 ‘스페셜 드라마’처럼 느껴진다. 1회 발레 하는 청순한 모습으로 시작해 고등학교 시절을 보여줄 때는 <마지막 승부> ‘다슬’이가 떠오르고, 8년 뒤 주리가 되어 돌아와 짙은 립스틱을 바르고 차가운 성격을 드러낼 때는 팜파탈의 매력이 돋보인다.
<엠>은 어떻게 보면 지금의 심은하를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촬영 2주가 지나고, 방송 2주가 남은 시점에 그는 스캔들이 터져 위기를 맞는다. 이홍구 작가는 “방송사에서 문제 삼으며 배우를 바꾸라고 했는데, 피디와 내가 이 드라마가 엎어지더라도 못 바꾼다고 밀어붙였다”며 “2주간 촬영을 해보니 선과 악, 양면성을 가진 얼굴이 배역과 너무 잘 맞았다. 대단한 배우였다”고 말했다. 첫 방송이 나가자마자 놀라운 연기에 논란은 쏙 들어갔단다. 심은하가 있어 <엠>이 빛났고, <엠>이 있어 심은하가 존재했다.
엠이 영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 “엠의 기본 인격은 사랑이라는 걸 보여준다”며 작가가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았다. 프로그램 갈무리
지금까지 쭉 읽고 ‘아니 왜 <엠>을 얘기하면서 가장 중요한 그 얘기를 안 해?’ 하며 의아해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하려고 한다. 바로 임신중지 얘기다.
사실 <엠>이 1994년 당시 화제가 됐던 것은 ‘낙태 반대’ 의견이 강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마리 엄마는 임신 4개월 때 태아 성감별 후 딸이어서 임신중절 수술을 하려다 실패했고(1부), 엠의 엄마는 남자가 이별을 통보하자 그의 핏줄을 없애는 게 복수라고 생각해 수술을 했다. 딸을 ‘낙태’하는 일이 “아들 선호사상, 동양적 사고방식이다”(1회)라는 대사가 직설화법으로 등장할 정도로 당시엔 남아선호사상이 심각했고 딸을 임신하면 중절 수술을 하는 일이 많았다.
드라마는 세번에 걸쳐 그런 행태를 “생명이 시작된 생명체를 아무런 가책 없이 살육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신부의 설교를 내보내는 등 생명 경시 풍조의 세상에 경종을 울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홍구 작가는 “우연히 낙태하는 초음파 사진을 보게 됐다. 그게 내 눈에는 도구가 들어가니까 태아가 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냥 슬펐다. 태어나지 못한 태아의 마음을 한번쯤은 드라마로 풀어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27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바뀌었다. 1953년 제정된 이후 약 66년간 임신중지를 금지해온 형법 제269조 1항(자기 낙태죄)과 형법 제270조 1항(의사 낙태죄)은 2019년 4월11일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효력이 사라졌다. 정부가 ‘낙태죄 일부 유지’라는 입장을 내놓고 ‘방치 전략’이란 비판이 나오기도 했지만 임신중지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관련이 깊다는 인식이 커졌다.
<엠>으로 장르 다양화에 큰 역할을 한 이홍구 작가는 13일 <한겨레>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처음 시놉시스를 보고는 다들 ‘미쳤다’고 했다”며 웃었다. 사진 위키미디어.
리메이크 과정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양쪽 의견이 대립했다. 현재 <엠>은 슈퍼문픽쳐스라는 제작사를 통해 리메이크가 진행 중이다. 애초 2020년 방영 예정이었지만 ‘낙태’ 설정을 두고 의견이 갈리면서 늦어졌다. 대본은 쓰지 않고 크리에이터로 참여 중인 이홍구 작가는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갔으면 했지만, 결국 시대 흐름에 맞춰 임신중지 이야기 자체를 빼고 가는 것으로 결정됐다.
그는 “낙태를 버리고 가다 보니 대안 찾기가 쉽지 않아 대본 작업이 늦어졌는데, 올해는 선보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 대본은 5~6부 정도까지 나온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난 여전히 낙태 반대론자다. 생명체라는 생각에서다.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겠지만, 태아가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 낙태시키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마리와 끝까지 함께하며 사랑의 힘을 보여주는 지석. 프로그램 갈무리
2021년 첫 명작으로 <엠>을 택한 이유는 따로 있다. 낙태와 관련한 인식 변화 등 사실 여러 가지 생각할 지점들을 남기지만 드라마가 진정 말하는 건 사랑의 힘이다. “모든 악은 사랑으로 치유될 수 있다” “사랑이 지극하면 악마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다”(9회)거나 “사랑이 있는 곳에 악이란 존재할 수 없다” “악을 선으로 만드는 방법은 사랑밖에 없다”(10회)는 식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한다. 그리고 드라마는 착하게 살라고 강조한다. 엠은 은희와 마리의 언니인 박수경(김은숙)은 해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 “가장 착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021년, 사랑하며 착하게 살자.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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