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어설픈 청춘이라도 럭비공처럼 살아 있는 젊음이었다

등록 2021-05-21 19:43수정 2021-05-23 18:53

[토요판] 남지은의 토요명작 리플레이
⑪ 베스트극장-태릉선수촌

미친 듯 뜨거운 열정을 내뿜던 공간
태릉선수촌이 배경인 첫 국내 드라마
유도·양궁·체조·수영 네 선수 주인공
<베스트극장―태릉선수촌>은 뜨거운 열정을 내뿜으며 청춘을 살았던 국가대표 선수 홍민기(이민기), 방수아(최정윤), 정마루(김별), 이동경(이선균)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윤정 피디는 “우리 나름의 태릉선수촌은 다 있다. 그들을 보면서 우리를 읽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화방송 제공
<베스트극장―태릉선수촌>은 뜨거운 열정을 내뿜으며 청춘을 살았던 국가대표 선수 홍민기(이민기), 방수아(최정윤), 정마루(김별), 이동경(이선균)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윤정 피디는 “우리 나름의 태릉선수촌은 다 있다. 그들을 보면서 우리를 읽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화방송 제공
“태릉선수촌에 사는 선수들 얘기 어때?”

기획회의를 하려고 갔던 제주도의 한 카페에서 홍진아 작가가 툭 하고 던졌다. 태.릉.선.수.촌. 그 단어를 듣기만 해도 열정이 폭발하는 느낌이었다고, 지난 17일 저녁 전화로 만난 이윤정 피디는 말했다. “당시 ‘청춘’이라는 키워드에 관심이 많았어요. 뜨겁고 좌충우돌하고 뭔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 마냥 예쁘고 안쓰럽게 느껴지던 때였죠. 그곳엔 이 모든 것이 담겨 있을 것만 같았어요.”

듣는 순간 “이거다, 됐다!” 했던 이 피디의 확신은 한달간 태릉선수촌을 취재하면서 더욱 진해졌다. “입구에 들어서면 정말 조용해요. 오래된 건물과 정원이 고즈넉하죠. 그런데 곳곳에 있는 건물의 문을 하나씩 여는 순간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요. 유도 훈련장을 열면 땀 냄새가 확 나면서 열기가 뿜어져 나와요. 정말 뜨겁죠. 선수들이 ‘왁’ 하는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훈련하고 있어요. 수영장 문을 열면 선수들이 죽기 살기로 물살을 가르고 있고. 그런 뜨거움이 너무 좋았어요.” 조용한 선수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청춘들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매일 그렇게 불타올랐다.

프로그램 갈무리
프로그램 갈무리

15년 전 젊은이들 청춘과 낭만 그려
“누구나 ‘태릉선수촌’ 같은 때 있어
그들을 보면서 우리 자신 읽을 것”

문만 열어도 열기 내뿜는 선수촌

그 감흥을 그대로 옮긴 것이 2005년 방영한 8부작(1회 2개씩) 드라마 <베스트극장―태릉선수촌>(문화방송)이다. 2008년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태릉선수촌에서 생활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열정과 사랑을 다뤘다. 태릉선수촌이 배경인 드라마도 처음이었고, 뚜렷한 기승전결을 벗어나 일상의 어느 시점에서 끝나는 구성도 당시에는 참신했다. 이윤정 피디는 “그때 좋아했던 미국 드라마 <케빈은 12살>처럼 주인공이 내레이션으로 끌고 가는 형식을 취했다”며 “<태릉선수촌>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만들었던, (내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라고 말했다.

<태릉선수촌>은 유도·양궁·체조·수영 선수 4인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제작진은 한달간 최대한 많은 선수를 만나 취재한 이후에 주인공과 종목을 정했다. 유도와 양궁은 올림픽에서 많은 메달을 땄던 효자 종목이다. 이 피디는 “유도는 역동적이면서도 재미와 사연 등 이야깃거리가 많았고, 특히 양궁은 국내 선수끼리 치르는 국가대표 선발전 경쟁이 올림픽 본선만큼 치열한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체조와 수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가 올림픽에 나가면 메달권에 들기 힘든 격차에서 오는 혼란이 흥미로웠어요.”

수영 이동경(이선균)과 유도 홍민기(이민기)가 만나는 고깃집과 양궁 방수아(최정윤)가 대표팀에서 탈락한 뒤 찾은 한강 장면 정도를 제외하면 이야기는 대부분 선수촌 안에서 벌어진다. 연인 이동경과 방수아는 트랙을 돌면서 데이트를 하고, 수영장에서 영화도 본다. 홍민기는 좋아하는 방수아의 기숙사 창문을 두드려 그를 불러내고, 수영팀과 유도팀이 축구 시합을 벌이기도 한다. 선수들의 훈련 모습, 기숙사 생활 등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호기심 가득한 현실의 공간을 드라마로 엿보는 재미가 컸다.

지금 다시 보면 4인방을 통해 느껴지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현실과 고민이 청춘의 낭만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동경은 우리나라 1위이지만 점점 기록이 떨어져 은퇴를 고민한다. 체육대학 교수, 국가대표·실업팀 지도자 자리가 없으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선수들의 은퇴 이후를 이동경이 비춘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도 금방 치고 올라오는 후배에게 밀린 뒤 슬럼프를 겪고(방수아), 올림픽만 바라보며 달려왔지만 부상으로 하루아침에 운동을 관두게 되기도 한다.(정마루) 홍민기는? 그야말로 ‘신예는 어떻게 탄생하는가!’이다. 홍민기는 여느 유도 선수들처럼 2진(올림픽 출전 선수 파트너)으로 선수촌에 들어와 갖가지 징크스를 깨고 국가대표가 된 뒤 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딴다.

배우들도 <태릉선수촌>을 촬영하는 순간만큼은 국가대표 못지않았다. 배우들은 일주일 동안 선수들이 받는 실전 훈련을 받았다. 이민기는 의상실에서 유도복을 빌려 촬영 전까지 입고 살았다고 한다. 사실감을 높이려고 살도 7㎏ 찌웠다. 이 피디는 “세계유도선수권대회 장면을 대역 없이 촬영했다”고 한다. 김별도 체조에서 공중 동작을 제외하고는 대역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 피디는 “이선균씨는 수영을 아예 못해서 처음에는 종목을 펜싱으로 바꿔달라고 했다”고 귀띔했다. 두 사람은 단막극을 함께 촬영하는 등 우정을 쌓았고 이후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도 함께 호흡을 맞췄다.

<태릉선수촌>을 촬영할 당시에는 제작진도 배우도 모두 신인이거나 무명이었다. 당시 김별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던 송하윤은 <태릉선수촌>이 데뷔작이다. 최정윤 정도만 ‘유명’(?)했다. 이 피디도 <떨리는 가슴―바람> 이후 연작은 처음이었다. “우리 모두 젊고 청춘이었죠.”(웃음) 청춘이기에 가능했을 장면들도 많다. 방수아와 홍민기가 큰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장면은 카메라를 한 시간 넘게 고정해놓고 두 사람에게 마음대로 연기하게 했다. 이 피디는 “배우들이 친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뒀더니 정말 친해져서 아름다운 장면이 탄생했다”고 말했다. 4인방이 빗속에서 운동장 바닥을 뒹구는 명장면은 지금도 회자된다. “의정부 엠비시(MBC) 연수원에서 촬영했어요. 진흙을 가져와서 바닥에 뿌리고 찍었는데, 관계자한테 엄청 욕먹었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2005년 당시 <태릉선수촌>이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청춘의 삶’과 함께 ‘청춘다운 사랑’을 잘 담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오랜 연인 이동경과 방수아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홍민기의 무대포 같은 사랑이 비중 있게 그려진다. 이동경은 은퇴 뒤 자신의 삶을 고민하느라 잠시 사랑에 소홀하게 된다. 홍민기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세워 방수아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유도복에 붙이고 다니는 ‘베스트홍’ ‘스페샬홍’과는 거리가 먼 어설픈 청춘이지만, 그 럭비공 같은 삶이 상대를 살아 있게 한다. 방수아가 이동경 대신 홍민기를 선택한 것도 “어디로 튈지 몰라 불안하지만 그래서 늘 기대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 기대라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겐 전부다. 그 힘든 태릉선수촌 생활을 버티게 한 힘이었을 테니까. 이 피디는 “우리 나름의 태릉선수촌은 다 있다. 그들을 보면서 우리를 읽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 선수들 일상·고뇌 사실적으로
허락되지 않은 공간 엿보는 재미도
“실제 연애는 선수촌 밖에서, 하하”

그래도 낭만 있던 그 시절 청춘들

<태릉선수촌>이 최근 만들어졌다면 요즘 드라마 흐름상 분위기는 좀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요즘 청춘의 이야기는 연애보단 취업, 미래에 더 관심이 있으니까. 선수들의 애환에 더 비중을 두고 힘든 현실을 더 깊게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2005년이 담은 태릉선수촌의 청춘은 그래도 낭만이 느껴지는데, 2021년의 청춘은 막막함만이 그려졌을 것만 같다. 2005년 태릉선수촌에서 청춘을 보냈던 선수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한판승의 사나이’로 유명한 이원희 용인대 교수는 17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다른 선수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저는 올림픽을 바라보면서 훈련만 했다”고 강조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 감동의 주인공이었던 송대남(당시 유도 90㎏급 금메달) 현 남자대표팀 코치도 “훈련에 집중하느라 선수촌 안에서 연애할 틈이 없었다”고 강조했다. 제작진이 꼼꼼한 취재를 통해 드라마를 만들었는데, 그럼 연애는 언제 하고 결혼은 어떻게 했나. 이구동성 “연애는 태릉선수촌 밖에서!” 아하!

어쨌든 2005년 <태릉선수촌>이 청춘의 사랑에 비중을 뒀다 하더라도 대사나 에피소드 등에서 현실을 꽤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유도 선수들이 산 정상에 오르다 구토하는 장면이나, 홍민기가 이종격투기 선수 제안을 받는 장면 등이 그렇다. 실제로 여러 종목 중에서도 유도 훈련은 강도 높기로 유명하다. 지금은 은퇴한 김재범 선수는 과거 인터뷰에서 “1등으로 들어올 때까지 반복 달리기를 할 때는 구토가 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원희 교수도 “올림픽 금메달을 딴 뒤 이종격투기 선수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금메달을 여러 개 따도 연금이 한정되어 있는 등 비인기 종목은 부와 명예를 함께 얻을 수 없는 현실 등도 드라마는 슬쩍 보여준다. 이윤정 피디는 “뜨거운 실재감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들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현실의 홍민기, 이동경, 방수아, 정마루는 지금도 뜨거운 땀을 흘리며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다. 태릉이 아니라 진천인 게 드라마와 다른 현실일까. 그때는 몰랐겠지만, <태릉선수촌>의 2005년을 담은 이 드라마는 어쩌면 역사적인 기록물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 국가대표 선수들은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하지 않는다. 충북 진천선수촌으로 모두 옮겼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전·현직 국가대표 선수들에게도 특별한 작품이 됐다. 송대남 코치와 이원희 교수는 입을 모아 “태릉선수촌은 청춘을 바친 곳”이라며 “지금도 머릿속에서 그 시절의 내가 맴돈다”고 말했다. 현실의 선수들에게 태릉선수촌은 청춘의 다른 말이다. 송대남 코치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2진으로 입촌했고, 코치 생활까지 합하면 16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이원희 교수는 1999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입촌해 2008년에 퇴촌했다.

현실의 태릉선수촌은 드라마보다는 냉정한 곳이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떨어지면 ‘알아서’ 바로 짐을 싸서 각자 나간다. “선발전 끝나고 일주일 후 대표팀이 구성되기 때문에 그 안에 나가 줘야 한다”고 송 코치는 말했다. <태릉선수촌>에서 금메달 몇 개씩 따줬던 방수아도 후배한테 밀려 대표팀에서 떨어지자마자 바로 짐 싸서 선수촌을 나왔다. 송 코치는 “드라마에서는 감독이 택시비라도 줬다지만, 현실에서 그런 경우는 별로 없다”며 “이긴 사람은 살아남는 거고 진 사람은 퇴촌해야 하는 거고. 그게 현실”이라고 했다.

선수촌 생활을 행복하게 매듭짓기 위해 현실의 홍민기, 방수아, 정마루, 이동경은 이제 채비를 갖춘다. 2021년 도쿄올림픽이 7월23일부터 8월8일까지 열린다. ‘현실의 홍민기’ 유도 선수들은 7월21일 출국한다. 23일 첫 경기를 치른다. 선수들은 이날을 위해 5년을 준비했다. 특히 유도 선수들은 올림픽 효자 종목이라는 부담감을 짊어지고 산다. 늘 스타를 배출했고, 늘 성적이 좋았기에 금메달을 따지 못하면 더 많은 욕을 먹는다. 송대남 코치는 “올림픽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선수들인 거다. 모두 응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첫 선수는 김원진이다. 극중 홍민기가 ‘스페샬홍’을 등에 붙이고 도복을 휘날리며 걸어 들어갔듯이 선수촌 생활 11년째인 그도 23일 힘찬 걸음을 내디딘다. <태릉선수촌> 홍민기의 기운이 그들 모두에게 가닿기를. 베스트홍! 스페샬홍!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 <한겨레> 문화부 기자. 언제든 옛날 콘텐츠를 다시 볼 수 있는 시대. 세대 불문 되감기하면 좋을 대중문화 작품을 소개하려 한다. 연출, 연기, 이야기 기본 3박자에 충실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옛 작품들이 콘텐츠의 본질을 일깨운다. 지금 시선에서 새 해석이 등장할지도. 제작진과 배우들의 비하인드 코멘터리도 담아보겠다. 3주에 한번 연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