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한겨레>를 찾은 배우 손지창은 90년대를 대표하는 청춘스타로 대학농구 드라마 <마지막 승부>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는 “하루하루를 승부처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꿈을 갖고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어, 내가 지금 <마지막 승부>를 보고 있나?’ 지난 1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사옥 주차장. 운전석에서 내려 걸어오는 그를 바라보다 이런 착각에 빠졌다면 안 믿겠지? 물론 과장된 표현이지만, 완전히 없는 말은 아니다. 1970년생 우리나이로 52살. 27년 세월이 스며들었는데도 그를 감싸고 있는 ‘청춘스타 보호막’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쩜 하나도 안 변했다”는 말이 그냥 나온다. “에이 무슨 소리, 저 50대 아저씨예요. 늙었어요, 늙었어.”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세상을 달콤하게 만들었던 청춘스타의 대명사 손지창. 그와 아저씨란 단어가 도무지 연결되지 않는 데는 빛나던 순간에 사라진 영향도 있다. 그는 2004년 드라마 <영웅시대> 이후 활동을 중단했다. 시청자들은 서서히 삼촌, 아버지 역을 맡으며 함께 나이 들어가는 손지창을 보지 못했다. 팬들의 마음속에서 그는 영원한 <무동이네집> <마지막 승부> <느낌> 속 손지창인 것이다.
그런 그가 최근 <불꽃미남>(티브이엔) 출연으로 ‘아재 인증’을 했다. 간혹 모습을 비춘 적도 있지만, 세월이 흘러 예능프로그램 고정 출연이라니. 청춘스타 이미지를 깨고 싶은 것일까? “박상혁 피디가 수년 전부터 제안하기도 했고, 다시 활동해보겠다는 느낌보다는 어떻게 하다 보니 활동을 안 하게 됐는데 그때 차라리 멋있게 은퇴 인사라도 하고 빠질걸 하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나를 좋아해주신 분들에게 인사한다는 생각으로 참여했어요.”
그가 활동을 중단한 이유는? “2003년에 둘째가 태어났어요. 아내(배우 오연수)가 다시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그럼 당신이 해라, 내가 안 하겠다’고 했어요. 그 전까진 아내가 일을 못 했으니까요. 어렸을 때 학교 끝나고 빈집에 혼자 문 열고 들어가는 게 정말 싫었어요. 우리 애들한테는 그런 마음이 안 들게 하고 싶었어요. 제겐 가족이 우선이에요.”
가족을 위하고 속이 깊다는 점에서 손지창은 <마지막 승부>에서 그가 맡았던 이동민과 닮았다. 이동민이 농구선수가 된 이유도 농구를 좋아하는 어머니 때문이고, 동료 선수와 함께 가는 조건으로 신라대에 진학하기로 했던 약속을 깨고 혼자 명성대에 간 이유도 아픈 어머니 병원비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친구 윤철준(장동건)은 등을 돌리고, 같은 팀 선배들조차 의리 없는 놈이라고 ‘왕따’시키는데도 그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사망한 뒤에야 이유를 알게 된 윤철준이 “왜 어머니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냐. 우린 너한테 친구도 뭐도 아니었다”라고 화를 내자 이렇게 말할 뿐이다. “아니, 그랬다면(친구가 아니었다면) 니가 날 버렸을 때 나도 널 버렸을 거야.” “새끼야!”(윤철준) “그래 인마!”(이동민)라며 끌어안고 우는 모습은 당시 남자들의 의리를 보여준 상징적인 장면(16회)으로 손꼽혔다.
스포츠 선수 주인공 내세워 성공
실전 같은 연기로 명장면 만들어
친구 배신 역으로 욕도 먹었지만
자신과 닮은 속깊고 따뜻한 인물
하지만 1994년 당시에 장동건은 의리의 사나이로 떠올랐지만, 손지창은 배신자로 욕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농구대회 장면은 시청자를 초대해 공개촬영을 하곤 했어요. 초반에는 제 팬이 훨씬 많았는데 나중에는 제가 공을 잡으면 ‘우~’ 하고 야유하는 소리가 들렸죠.” 서운하지 않았냐니 “대결구도를 만들어야 하니 어쩔 수 없다”면서도 “누가 제 차 번호판을 떼어 갔는데 좋아해서 가져간 건지, 미워서 가져간 건지 헷갈리긴 하더라”며 웃었다.
그런데 지금 보면 오히려 윤철준이 더 밉다. 자신의 실력으로 친구들 미래까지 책임지고도 “우리 모두 함께 해낸 것”이라고 말하던 그 착한 이동민이 왜 ‘배신’을 했는지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고 매정하게 등을 돌린다. 친구라면 이동민의 아버지에게 물어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친구라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동민이를 비난하는 다른 친구들을 설득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하하, 그랬다면 드라마가 안 됐겠죠.” 그렇긴 하지만, 2021년의 시선에서 이동민이 안쓰러운 건 어쩔 수 없다. 대학교 1학년. 청춘이 짊어지기에는 가혹했다. 어쩌면 청춘의 전부였을 수 있을 사랑, 정다슬(심은하)마저 윤철준을 택하지 않았나.
<마지막 승부>는 농구드라마이지만, 윤철준과 이동민, 정다슬과 최미주(이상아)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주요하게 다뤄진다. 이동민과 윤철준은 농구는 물론 사랑에서도 라이벌이다. 처음에는 이상아가 정다슬이었다. “최미주 역할 오디션을 보는데 상아씨가 시범을 보였어요. 너무 잘한 거죠. 감독님이 상아씨에게 미주 역할을 맡기고 다슬 역할에 다른 배우를 찾았어요.” 여러 배우를 거쳐 당시 <문화방송> 공채 탤런트로 신인이었던 심은하한테 배역이 돌아갔다. “심은하씨가 처음에는 굉장히 부담스러워했어요. 연습실을 나오면서 ‘이걸 왜 나한테 시키지’라고 혼잣말을 하더라고요. 하하하.”
정다슬이란 이름 자체가 청순가련형의 대명사가 됐다. 그런데 웬걸, 다시 봐보라. 답답하기 그지없다. 1990년대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2021년에 이런 캐릭터, 곤란하다. 친구를 위한다는 행동은 오히려 난처하게 만들고, 매사 태도가 애매하다. 정다슬을 보는 내내 답답해 미칠 것 같은 마음을 8회 최미주가 씻어준다. “너의 불분명한 태도가 여러 사람을 헤매게 만들고 있다.” 오히려 최미주가 멋지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동민이 정다슬을 좋아하는 걸 알기에 사랑을 구걸하지 않는다. 훼방 놓지도 않는다. 셋이서 밥 먹자는 동민에게 “저녁은 동민씨가 이 미주를 원할 때 먹겠어요. 다슬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지만 동민씨하고는 안 맞아요. 물론 서로가 잘 안 맞는다는 걸 아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겠죠”라며 기다린다. 자격지심 심한 윤철준도 지금 시선에선 딱히 멋져 보이진 않는다. 손지창은 “만화 <슬램덩크>의 소연 역할 같던 신은경씨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마지막 승부>는 ‘농구드라마’ ‘청춘드라마’로 기억되는데, 다시 보면 또 다른 지점도 발견된다. 대학농구계의 현실이 제법 사실적으로 나온다. 고등학교 선수들이 어떤 과정으로 대학에 가게 되는지, 대학농구팀은 어떻게 운영되는지 등이 어른이 된 지금은 ‘배우’보다 눈에 먼저 들어온다. 이사장 사모에게 없는 살림에 큰돈 들여 스카우트해 온 에이스 김선재(이종원)를 기용하지 않았다고 한 소리 들은 한영대 농구부 감독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씁쓸하다. 이사회에 의해 농구팀이 해산되고 운동만 하던 선수들이 당장 뭘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모습은 공부는 뒷전인 우리나라 대학 스포츠의 현실을 보여준다.
스포츠 폭력 사건이 끊이지 않아서일까. 1994년 방영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았을 장면들도 심각하게 다가온다. 선후배 간 훈련을 빙자한 폭력적인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명성대 주장 김만재(허준호)가 ‘군기’ 잡는 장면이 많다. 신입들이 농구공을 제대로 닦아놓지 않았다고 폭력을 행사하는 식이다. 특히 이동민을 그렇게 괴롭혀놓고는 7회 전지훈련 마지막날 갑자기 “본의가 아니었다. 감독님이 널 좀 밟아놓으라고 하더라. 넌 성공할 것이다”라며 그를 아주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놓는다. 김만재는 실업팀에 간 뒤에도 명성대가 한영대한테 지자 학교에 찾아와 후배들을 엎드려뻗쳐 시킨 뒤 몽둥이로 때린다. 물론 사랑의 매다. 폭력은 대물림된다. 장용호(박형준)와 이동민은 11회에서 자신들이 당했던 걸 똑같이 신입들에게 시킨다. 예전 드라마를 즐겨본다는 한 팬은 “옛날 드라마에서 여자 동생들이 오빠를 위해 희생하거나 젠더 감수성이 떨어지는 장면들이 나오면 저땐 저랬구나, 이젠 바뀌었을 거라 생각하며 보게 되는데, <마지막 승부>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부분은 왠지 현실에서 계속되고 있을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배우들도 혹독하게 촬영했다. 배우들은 대부분 손지창이 뛰고 있던 연예인 농구팀에서 선발했다. “감독님이 오셔서 연예인 농구팀이 경기하는 모습을 보며 캐스팅을 했다”고 한다. 박형준 등 주요 배역이 그렇게 선발됐다. 손지창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농구를 좋아했다. 드라마 촬영 전부터 연예인 농구팀에서 활동했다. 다른 배우들에 견줘 키는 조금 작았지만 실력은 좋았다. 당시 몸무게가 58㎏으로 말랐다는데 극중에서 3점슈터였다. 실제로도 3점슈터다. 손지창은 “<슬램덩크> 정대만을 좋아해서 등번호가 14번이었다. 결정적일 때 3점슛을 꽂아넣는 3점슈터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농구를 좋아하는 배우들끼리 모였으니 수시로 농구를 했다. 촬영을 할수록 배우들의 실력도 늘었다. “<마지막 승부> 촬영 때는 우리 팀과 용산고 1, 2학년 선수들과 붙어도 안 밀렸다”며 웃었다. 지금은? “당연히 밀리죠. 하하.”
배우들 모두 농구를 꽤 해서인지 경기 장면은 지금 봐도 박진감 넘친다. ‘89년 대학농구 춘계연맹전’부터 ‘92-93년 농구대잔치’ 등 경기 장면이 꽤 오래 자주 나온다. 경기 모습만 보고 있어도 재미있다. 촬영 때 실제로 양 팀이 경기를 했단다. “공개촬영을 하면 오전 10시부터 시작해서 저녁 7~8시까지 중간에 잠깐 물 마시며 쉬는 시간 빼고는 계속 경기를 했어요. 나오는 그림을 보고 구성한 다음에 관객들이 빠지고 나면 덩크 등 시나리오에 필요한 장면을 따로 땄어요.” 극중 이동민의 특기로 나오는 일대일 마크에서 뒤돌아 3점슛하는 장면이나 윤철준의 덩크슛 장면은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서 따로 촬영했다. 프로 팀들 경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두 팀이 어느 정도는 대결을 한 셈이다. 종일 촬영이라니.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이다. 이종원이 촬영 도중 한쪽 발뒤꿈치 뼈가 부러져 8주 중상을 당하면서 농구를 그만두는 내용으로 바뀌는 등 사고도 많았다.
그도 많이 다쳤다. 박형준과 산악자전거를 타는 장면에서 한쪽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 소품용 자전거를 탔고, 결국 고장이 나면서 넘어져 왼쪽 팔이 겨울의 아스팔트에 쏠렸다. 그 상태로 잠시 쉰 뒤 촬영을 마쳤고, 당일 저녁 음악프로그램까지 출연한 뒤에야 병원에 가서 응급처치를 받았다. 뼈가 깨진 걸 모르고 다음날 공개경기 장면 촬영까지 끝냈다. 그의 왼쪽 팔에는 그때 생긴 흉터가 지금도 크게 남아 있었다. “그때는 그랬어요. 다쳐서 촬영 중에 병원 간다고 하면 무책임한 사람이 되는 시절이었죠.” <마지막 승부>는 그에게 좋은 기억만 남겨준 건 아닌 것 같았다. “참 많이 힘든 드라마였다”며 그는 웃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스포츠드라마이자 선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드라마라는 호평은 지금껏 따라다닌다. 이후 아이스하키 <아이싱>, 격투기 <이 죽일 놈의 사랑> 등을 만들었지만 제2의 <마지막 승부>는 나오지 않았다. 선수가 주인공인 스포츠드라마는 철저히 마니아 위주여서 성공하기가 힘들다는 게 중론이다. 손지창은 “<마지막 승부>가 성공한 데는 당시 사회 전반에 불었던 농구 열풍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때는 농구공 안 들고 다니는 애들이 없었다”며 “드라마도 재미있었고, 연·고대팀 등을 중심으로 한 대학농구와 <슬램덩크> 만화의 인기 등 삼박자가 잘 맞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2004년 끝으로 연기 은퇴했다가
17년 만에 ‘불꽃미남’ 고정 출연
“꿈을 갖고 도전 두려워 말라고
청춘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그의 말처럼 1990년대 농구는 당시 청춘의 상징이었다. <슬램덩크>가 인기를 얻었고, 1993~94년 농구대잔치에서 문경은-우지원-서장훈-이상민을 앞세운 연세대팀이 활약하며 농구 인기를 이끌었다. 94년에 나온 <마지막 승부>는 그 인기와 맞물려 시너지를 낸 것이다. 1997년 프로농구도 출범했다. 실제 드라마에는 당시 기아 선수였던 허재가 한영대 선배로, 서장훈-문경은-우지원 등 연세대 선수들이 국가대표 멤버로 특별출연한다.
의외로 마지막회 40%가 넘는 시청률에도 필요 이상의 비용을 낭비했다고 회사에서 징계를 받았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별은 내 가슴에> 마지막 장면 못지않은, 윤철준과 정다슬이 팬들에게 둘러싸여 끌어안는 15회 장면이 화제가 되지 못한 건 아쉽다.
그는 우리에게 청춘의 기억을 선물해줬지만, 그에게도 아름다운 청춘이었을까? “22살부터 27살까지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어요. 내가 이 일을 못 하면 난 뭘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그땐 그렇게 일을 했어요. 농구를 못 하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동민이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20대 때 전 우물안 개구리였지만, 더 다양한 꿈을 갖고 많은 것에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고, 매일이 마지막 승부 같을 오늘의 청춘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그래서일까, 요즘의 손지창은 주저하지 않는다. 여담 하나, 평소 즐겨 보는 <대한 외국인>에 출연한다. 그가 직접 전화를 걸어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단다. “저 손지창인데 출연해도 되나요, 라고 전화했더니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하하하.”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 <한겨레> 문화부 기자. 언제든 옛날 콘텐츠를 다시 볼 수 있는 시대. 세대 불문 되감기하면 좋을 대중문화 작품을 소개하려 한다. 연출, 연기, 이야기 기본 3박자에 충실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옛 작품들이 콘텐츠의 본질을 일깨운다. 지금 시선에서 새 해석이 등장할지도. 제작진과 배우들의 비하인드 코멘터리도 담아보겠다. 3주에 한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