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영산 한라산(1950m). 제주도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면서 남한 땅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다. 제주도를 둘러보는 동안 언제 어디서든, 여행자의 시야 한 귀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산이다. 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빼어난 자연생태와 경관, 일망무제의 정상 전망으로 사철 산행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명산이다. 특히 한겨울엔 장엄하고도 매혹적인 설경으로 산꾼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한라산이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산행을 허락하는 건 아니다. 겨울엔 폭설로 입산이 금지돼 아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때도 적지 않다. 겨울이 아니더라도 분화구 백록담이 있는 정상까지 다녀오려면, 어느 코스를 택하든 하룻낮이 꼬박 걸린다. 눈꽃 트레킹 코스로 많이 찾는 산 중턱의 사라오름(1325m), 그리고 영실~윗세오름~어리목 코스도 4~5시간을 잡아야 한다. 체력적으로 본격 등산은 엄두가 나지 않고, 일정이 빠듯해 긴 시간을 내기 어려울 때, 가벼운 눈길 트레킹을 즐길 만한 곳은 없을까? 한라산 북서쪽 자락 어리목휴게소로 차를 몰면 된다. 짤막한 눈길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어승생악(어승생오름) 코스가 기다린다. 짧지만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한라산 본격 산행 대체 탐방로다.
눈덮인 한라산 어슬생악을 관광객들이 걷고 있다.
어리목탐방안내소에서 왕복 1시간~1시간 30분이면 다녀올 수 있는 가벼운 산행 코스다. 눈꽃·서리꽃 만발한 숲과 눈 덮인 한라산의 위용, 그리고 탁 트인 바다 전망(맑은 날이라면)까지 만날 수 있다. 어린 자녀를 동반한 가족여행자도 산행이 가능한 곳이다. 물론 눈길이 얼어붙어 있을 때가 많으므로, 안전을 위해 등산화에 아이젠은 착용해야 한다.
어승생악(1169m)은 한라산 북서쪽 자락에 솟은 기생화산이다. 정상 부근엔 지름 200여m의 분화구가 있는데, 단일 분화구를 가진 오름 중에선 가장 높은 지역에 있는 오름이라고 한다. ‘어승생’(御乘生)이란 이름은 조선 시대 이 부근에 있던 말 목장에서 난 명마를 임금에게 바쳤던 데서 비롯했다.
산행 출발점은 어승생악 탐방안내소 옆이다. 1.3㎞, 30분이면 정상까지 걸어 오를 수 있다. 나무계단이 설치돼 있지만, 겨울엔 눈에 묻혀 있는 경우도 많다. 다래나무·고로쇠나무·쥐똥나무 등 다양한 활엽수 우거진 숲길은 눈이 온 뒤엔 온통 눈꽃밭이 되고, 눈이 녹은 다음엔 서리꽃밭이 되어 탐방객을 맞아준다. 탐방로변 나무들엔 나무 이름과 설명 팻말을 걸어놓아, 나무 공부도 할 수 있다.
산길이 험하지는 않지만,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며 일부 빙판이 된 구간이 생길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정상에서의 전망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완만하고 장대하게 이어지는 흰 눈 덮인 한라산 능선과 무수한 오름들 깔린 평원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짙은 구름에 덮여 있을 때도 잦지만, 하늘 한쪽이라도 틔어 있는 날이면 여기저기 솟아오른 크고 작은 오름들과 제주 시내 일부 경관, 그리고 멀리 제주 앞바다까지 눈에 들어온다. 한라산 정상 쪽은 특히 구름에 가려져 있을 경우가 많다. 구름 없이 맑은 날이면 북쪽으로 바다 멀리 추자도와 동쪽 성산 일출봉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어승생악 정상 부근엔 일제강점기 말기에 일본군이 마지막 발악을 하며 미군에 대항하기 위해 파놓은 동굴 진지가 남아 있다. 어승생악 눈길 산행 코스가 짧고 편하긴 해도, 춥고 칼바람 부는 날이라면 보온에 신경 써야 한다. 특히 정상 부근에선 매서운 바람이 몰아칠 때가 많다. 그리고 많은 눈이 쌓여 있을 경우 위험할 수 있으므로 탐방로를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어리목 탐방안내소에 해설사가 대기한다. 오전 10시, 오후 2시 두 차례 참가자들을 이끌고 숲 해설을 해준다. 어승생악 탐방 전후로, 탐방안내소의 전시관에도 들러볼 만하다. 전시관은 1·2층에 마련돼 있다. 한라산 형성 과정을 정리한 ‘한라산 탄생 이야기’, 한라산의 자연과 역사, 등반 이야기 등을 자료와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다. 등산로를 표시한 한라산 모형도 있다. 어리목광장엔 아담한 눈썰매장이 설치돼 있어 눈썰매·대나무 스키 등을 체험할 수 있다.
글·사진 이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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