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싱턴 제주 호텔의 한식당 ‘돌미롱’의 전통주 바. 이곳에서는 여러 종류의 제주 전통주들을 한번에 맛볼 수 있다.
조선 시대 풍경을 다룬 대표적인 풍속화 ‘주사거배’(酒肆擧盃)는 천재 화가 신윤복이 금주령에도 술을 마시겠다고 주막을 찾은 양반들의 행태를 그린 그림이다. 안달하며 술을 간청하는 양반들의 몸짓과 느긋하게 앉아 술을 뜨는 주모의 여유 있는 표정이 대비되어 웃음을 자아낸다. 술맛이 오죽 좋으면 양반네들이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까 싶다.
술은 과하면 독이 되지만 적당히 마시면 삶의 활력소가 된다. 프랑스인들의 유쾌한 인생은 기실 날마다 마시는 하루 두 잔의 와인 때문이라는 소리도 있다. 우리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음주·가무를 즐기는, 흥이 넘치는 민족이다. 예부터 집집마다 수대에 걸쳐 내려오는 양조 비법이 있어, 명절이나 제사 때마다 술을 빚어 마셨다. 돈을 받고 술을 파는 주막도 주인장의 양조법에 따라 맛이 달랐다. 개성이 강하고 다채로운 술이 전국에 넘쳐났다. 안타깝게도 이런 전통은 일제 강점기에 파괴됐다. 1916년 조선총독부(일본이 조선 통치를 위해 세운 직속기관)는 조세령을 내려 술에 세금을 매기고, 가양주(집에서 빚은 술) 제조도 금지했다. 전국의 명주들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다행히도 사라졌던 우리 명주들이 서서히 부활할 조짐이다. 한식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자 우리 전통술에 관심을 갖는 외국인도 많아졌고, 우리 술의 소중함과 매력에 눈뜬 20~30대들도 늘었다. ‘막걸리 학교’ 같은 교육기관도 생겼고, 주류회사들은 고문헌의 기록을 바탕으로 전통술을 복원하고 있다.
제주도 마찬가지다. 몇 년 전부터 제주만의 독특한 지역적 특색이 녹아 있는 전통주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여행객들이 주점에서 맛본 이들 술에 반해 고향으로 돌아갈 때 한두 병씩 사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육지와 달리 제주 전통술의 특징은 주재료가 흰쌀이 아니다. 좁쌀이나 오가피 같은 약재다. 땅이 척박해서 논농사가 어려웠던 제주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제주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술 ‘오메기술’은 제조법도 독특하다. 좁쌀가루로 만든 오메기떡을 발효시켜 만든다. 이 술을 증류하면 고소리술이 된다. 육지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제주 바람과 자연이 빚은 술이다.
오메기술, 제주를 대표하는 술
좁쌀 특유의 독특한 향이 매력적인 술이다. 새콤하지만 톡 쏘는 맛은 없다. 부드럽다. 잘 빚은 오메기술은 빛이 은은해 마음마저 푸근해진다. 제주 전통 떡인 오메기떡을 발효시켜 만든 술이다. 제주 사람들은 잔치, 제사에 이 술을 자주 마셨다. 그러다 보니 잔칫상에 흔히 나오는 빙떡(채 썬 무 등을 메밀 부침개로 돌돌 말아 만든 제주 전통 음식)과 맛의 궁합이 좋다. (13도)
오메기술의 사촌, 고소리술
술을 증류할 때 쓰는 도구를 ‘소줏고리’라 한다. 제주에서는 이를 ‘고소리’라 한다. 오메기술을 증류해 만든 술이다. 도수가 오메기술보다 높아 자칫 한두 잔 마시다 보면 쉽게 취하는데, 숙취는 그다지 없다. (40도)
제주의 최고 고급술, 녹고의 눈물
제주 전통술 ‘녹고의 눈물’은 예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에 ‘녹고’와 ‘수월이’ 남매가 살았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이들 남매는 100가지 약초를 모아 다려 먹이면 낫는다는 스님의 말을 믿고 약초를 구하러 다녔다. 99가지 약초를 구하고 마지막 한 가지 약초인 오가피를 구하러 수월봉 절벽에 갔다가 수월이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수월봉 아래 가면 절벽 지층 틈 사이로 빗물이 똑똑 떨어지는데, 이를 보고 사람들은 ‘녹고의 눈물’이라고 일렀다. 항암 효과가 큰 제주 오가피 등이 재료인 이 술의 이름이 ‘녹고의 눈물’이 된 사연이다. 전복이나 버섯요리와 잘 어울린다. (16도)
제주의 새 얼굴, 맑은 바당
‘맑은 바당’은 제주로 이주한 임효진씨가 차린 양조장 ‘제주바당’에서 만드는 술이다. 기름진 전과 맛 궁합이 잘 맞는다. (15도)
제주/글·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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