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항쟁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 <지슬>의 포스터를 촬영한 용눈이오름 전경. 사진 문신기 작가.
위 사진과 같은 장소에서 촬영한 포스터 스틸 사진으로 겨울 용눈이 오름에서 한 병사가 여인에게 총을 겨눈 채 갈등하는 장면이다. 영화사 진진 제공
구불구불 이어진 올레길에 눈발이 흩날렸다. 길 양쪽 돌담에 쌓인 눈, 초가지붕들 위에도 눈이 내리고, 300년 된 커다란 팽나무에도 눈발이 날렸다. 그 팽나무 아래 ‘폭도’를 잡지 못한 한 병사가 철모만 쓴 채 알몸으로 떨며 서 있다.
제주 4·3항쟁을 다룬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2013, 감독 오멸)의 한 장면이다. 영화 속 이 장면은 마치 수묵화를 보는 듯했다. 제주4·3이 주는 역사적 무게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흑백의 영상미를 비극미로 전환한다.
제주에서는 <지슬>을 비롯해 <이재수의 난>, <구암 허준,>, <거상 김만덕> 등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도 많이 제작됐다. 늦가을, 영화와 드라마 현장을 돌며 숱한 고난을 이겨낸 섬사람들과 역사를 생각한다. 제주 섬이 보여주는 원색의 아름다움이 그 역사를 덮는다.
제주의 숱한 아픔 중 현대사에 가장 큰 상흔을 남긴 것은 4·3항쟁이며 이를 정면으로 응시한 영화가 <지슬>이다. 제주4·3(1947~1954년)은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 중 하나다. 당시 제주도 전체 인구의 10%인 2만5천~3만여명의 인명 피해가 난 것으로 추정된다. <지슬>은 스크린에 옮겨진 4·3항쟁의 진혼곡이자, 4·3 문화사에 큰 획을 그은 작품이다. 2013년 선댄스영화제 월드시네마 극영화 경쟁부문 심사위원 대상과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4관왕을 휩쓰는 등 당시 국내외 찬사를 받았다.
<지슬>은 제주돌문화공원의 제주전통초가마을과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동백동산의 반못굴, 구좌읍 용눈이오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를 주 무대로 2011년 11월부터 10개월 동안 촬영됐다.
지난 13일 <지슬>의 기억을 따라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 있는 제주돌문화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는 늦가을의 정취가 묻어났다. 입구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억새와 간간이 노랗게 물든 감나무가 한 폭의 한국화 같은 풍경을 선보였다. 제주의 창조여신 설문대할망의 돌탑과 이스타 섬의 모아이 석상처럼 서 있는 돌하르방들을 지나면 억새밭 사이로 제주의 전통초가마을이 나타난다. 2011년 2월 공원 내 1627㎡의 터에 15가구 49채의 제주 전통초가마을을 옛방식 그대로 재현했다. <지슬>은 이 마을에서 촬영한 첫 영화다.
올레길을 따라 걷다 보니 영화 속에서 토벌대가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이 달아나는 모습이 오버랩 된다. 토벌대 ‘백 상병’이 “밥 처먹으려면 폭도들 목을 따오라고” 하는 말에 ‘박 일병’이 “저 여자도 폭도입니까”라고 묻는 인상적인 장면도 이곳에서 촬영됐다.
이 마을에 사용된 기둥과 마루는 대부분 철거한 옛 제주 초가의 재료들을 사용했다. 한 텃밭에는 드문드문 하얗게 목화꽃이 피어 있었다.
조천읍 선흘곶 동백동산은 곶자왈 지대다. 2010년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이곳은 <지슬>의 동굴 속 장면을 촬영한 곳이다. 선흘곶은 주민들이 생계에 필요한 자원을 얻는 장소였으며, 4·3 당시 주민들이 토벌대에 집단학살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실제 영화가 촬영된 반못굴과 주변 동굴 지대에서 많은 주민이 희생됐다.
곶자왈은 여전히 푸르렀다. 바람이 곶자왈 푸른 상록수림의 나뭇잎을 흔들어 깨운다. 난대성 상록수가 우거져 한낮인데도 곶자왈 안은 조금 어둡다. 동백동산 습지센터에서 탐방로를 따라 200여m 가면 반못굴이 나타난다. 주민들이 아기를 안고 토벌대를 피해 숨어들던 곳이다. 반못굴이 아니더라도 동백동산은 탐방로가 잘 마련돼 있어 센터에서 1시간30분 정도 걸으며 곶자왈을 느낄 수 있다.
<지슬>의 포스터 사진이 촬영된 곳은 용눈이오름이다. 걸어서 20분 남짓이면 오를 수 있는 이 오름은 관광객들에게도 잘 알려진 오름이다. 하얀 눈이 얕게 깔린 겨울, 용눈이오름의 부드러운 능선을 배경으로 한 병사가 ‘순덕’에게 총을 겨눈 채 갈등한다. (사진1) 그 사이 보따리를 안은 순덕이 도망가다 다른 군인들한테 붙잡혀 끌려가는 비극적인 모습이 아른거린다. 이 영화의 절정은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에서 찍은 장면이다. 실제 동광리 주민 120여명은 1948년 겨울 제주4·3 당시 50~60일 동안 굴속에서 피신 생활을 하다 토벌대에 발각됐고, 한라산으로 도망가다 붙잡힌 주민들은 정방폭포에서 총살됐다.
동광 환승센터에서 오설록 녹차밭으로 가다 보면 길 오른쪽에 ‘4·3 유적지’라는 세움 간판이 보인다. 그곳에서 1.3㎞ 떨어진 곳에 큰넓궤가 있다. 입구에는 ‘지슬 촬영지’라고 적혀 있고, 길 양쪽에는 리본들이 매달려 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이곳에서 촬영됐다. 캄캄한 굴속, 주민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블랙코미디 같은 웃음과 결혼 이야기 등 일상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재수의 난>(1999, 감독 박광수) 촬영지 아부오름에서는 20세기 벽두의 항쟁 역사를 돌아본다. 아부오름은 제주에서 가장 쉽게 오를 수 있는 오름이다.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에 위치한 이 오름은 5분이면 오르지만, 감흥은 5시간 오른 것 이상이다. 멀리 한라산 정상이 보이고, 그 아래로 크고 작은 오름들이 펼쳐진다. 분화구 둘레도 평평해 30분이면 한 바퀴 돌 수 있다.
이곳에서 이재수 역의 이정재가 ‘대정창의’(大靜唱義)라 써 있는 깃발을 들고 포스터를 찍었다. 영화의 소재가 된 ‘이재수의 난’은 1901년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관리의 폭정과 당시 천주교의 권세를 등에 업고 횡포를 부린 일부 천주교인과 탐관오리 등을 축출하기 위해 제주도민들이 맞선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교인 등 700여명이 희생됐으며, 당시 민란을 이끌었던 ‘장두’ 이재수 등 3명은 서울로 압송돼 처형됐다. 그 뒤 이재수는 제주도민들 사이에서 설화 속 영웅으로 남았다.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다면, 서귀포시 안덕면 안덕계곡으로 떠나보자. 이곳은 최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고 김주혁씨가 출연한 MBC특별기획 드라마 <구암 허준>(2013)의 촬영지다.
지난 11일 안덕계곡에 들어서자 난대 활엽수가 우거진 계곡은 아직 울창했다. 절벽 사이 산책길로 접어드니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물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투명하다. 가지를 길게 드리운 늙은 팽나무가 수면에 비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곡의 기암절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구암 허준>에서 허준(김주혁)이 어머니 손씨(고두심)의 손을 잡고 계곡을 건너던 그곳이다. 계곡의 웅장함과 난대 상록활엽수, 계곡에 흐르는 물이 조화를 이뤘다. 산책길 데크 양쪽으로 난대림의 대표적 수종인 종가시나무를 비롯해 덧나무, 푸조나무 등 푸른 잎의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절벽 위 노랗게 변한 잎이 바람에 눈처럼 나풀댄다. 마치 드라마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인다. 제주/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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