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한림읍에서 돌빛나예술학교를 운영하는 조환진(왼쪽)씨와 그의 부친 조창옥 옹.
제주도가 본격적으로 도시화·산업화하기 이전에는 마을마다 ‘돌일’을 하는 전문 석공이 있었다. 이들은 마을과 집을 이어주는 올렛담이나 밭담, 집의 축담, 산담 쌓기 등을 작업했다. 돌 문화가 제주의 대표적인 문화 상징으로 등장하면서, ‘돌챙이’(석장의 제주식 변음어)나 ‘석수장이’라고 불리던 석공에 관심이 높아졌다.
제주시 한림읍에서 돌빛나예술학교를 운영하는 조환진(45)씨와 그의 부친 조창옥(96)옹은 부자 석공이다. 8월5일 돌빛나예술학교에서 조씨 부자를 만났다. 넓은 대지 한쪽에는 돌담 쌓기 체험 학습을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석공 일을 하기 시작했어. 어른들한테 배우고, 남이 하는 걸 보면서 자연스럽게 밭담을 쌓고, 산담을 쌓으러 다녔지.”
80대까지만 해도 돌담 쌓기를 했던 조옹의 돌일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옹은 “옛날에는 장비가 없어서 ‘도치’라는 도끼로 작업했는데 돌을 다듬는 게 많이 힘들었다. 그러다가 왜정(일제강점기) 때 ‘겐노’라는 돌을 깨는 데 쓰는 큰 쇠메가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돌일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산담 쌓는 일을 한 조옹은 “산담은 제주도에만 있다”며 “방목한 소나 말이 봉분을 파헤치는 것을 막고 들불에서 보호하기 위해 산담을 쌓았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군은 제주도민들을 동원해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을 건설했다. 조옹은 “차가 없어 한림에서 대여섯 시간 걸어가거나, 목탄차를 타고 가 비행장을 만드는 데 동원됐다. 당시는 포클레인 같은 장비가 없어서 바위를 끌로 뚫고 화약을 질러 부수면서 비행장을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4·3사건이 일어나 고향 한림읍 동명리가 소개됐다가 재건하자 마을로 들어가 성담을 쌓기도 했다. 조옹의 전성시대는 1970년대다. 박정희 정권 시절 초가를 개량하면서 집집이 돌집을 짓자 본격적으로 석공 생활을 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아들 환진씨는 “2003년에 결혼하고, 2005년에 살 집을 돌집으로 짓기로 작정해 직접 스케치한 뒤 그때부터 아버지께 배우면서 석공의 길로 접어들었다. 아버지께서 돌담 쌓는 법, 돌 다듬는 법 등을 하나하나 가르쳐줘 틈틈이 짓다 보니 3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대학 2학년 때 돌담에 눈을 떴어요. 서울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강원도를 가는 길에 주변을 보니 돌담이 없는 겁니다. 그때 충격받았어요. 제주도에만 돌이 많다는 걸 그때 깨달았지요.” 환진씨는 졸업 후 2008년께 조경업을 하다 돌담 쌓는 일을 대중화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아버지 세대는 밭담을 직접 쌓을 수 있었는데, 요즘 사람들은 모른다. 태풍으로 울타리가 무너지면 1년이 지나도 그대로다. 쌓을 사람이 없고, 쌓을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구나 할 수 있던 제주도의 전통문화가 맥이 끊기고 있다는 걸 깨닫고 대중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 뒤 7년 남짓 아버지와 다른 석공들로부터 돌일을 배워 2015년 5월 돌빛나예술학교를 만들었다. 그는 “돌은 제주도의 보물이다. 돌담에는 경관만이 아니라 사연들이 깃들어 있다.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밭의 자갈을 온 가족이 주워 날라 밭담을 쌓았다. 그 뒤 경운기와 트랙터로 더 깊이 밭을 갈아 돌들을 또 주워 날랐다. 그래도 계속 돌이 나와 지금도 계속 밭담을 만든다”고 했다.
그는 “돌담은 지형에 따라 자연스럽게 구불구불한 선 자체가 예술이다. 정형화한 게 아니라 밭 주인들이 농사를 지으며 그때그때 밭에서 나온 돌들을 자연스럽게 쌓았다. 또 돌담 사이 구멍도 미학적이다. 해가 뜰 때나 저물녘 역광이 구멍 사이로 비치면 예술작품이다”고 말했다.
“이제는 사람들이 제주도 돌담의 가치에 눈을 뜨고 있다. 돌담을 보존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교육한다”는 그는 제주도의 돌담 명소로 애월읍 금성리를 꼽았다.
“애월읍 금성리와 곽지리, 귀덕리의 돌담을 좋아하는데, 곽지와 귀덕은 개발 속도가 빠릅니다. 그나마 금성리는 잘 남아 있고, 그곳에서 잘짓 4개를 찾았는데 언제 사라질지 몰라요. 잘 보존해야 합니다.”
제주/글·사진 허호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