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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제주엔

청초한 동백꽃…겨울에 더 푸른 마을 제주 선흘리

등록 2018-12-10 09:59수정 2018-12-10 10:18

[제주&] 푸른 크리스마스 선흘리 기행

선흘리의 어머니 거문오름과 동백동산
일본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한 장면처럼
정오에도 초저녁처럼 어두운 울창한 숲
4·3사건 아픔 간직한 수호목
거문오름의 신비한 숲속. 초록 이끼 옷을 입은 바위들 사이로 고사리가 바람에 흔들린다.
거문오름의 신비한 숲속. 초록 이끼 옷을 입은 바위들 사이로 고사리가 바람에 흔들린다.
제주 동부 조천읍에는 ‘선흘리’라는 마을이 있다. 키 작은 돌집, 정감 있는 돌담과 밭담 그리고 굴곡진 커다란 팽나무 등 전형적인 고즈넉한 제주 중산간 풍경이 있는 곳이다. 이 작은 마을은 겨울에 더 아름답다. 모든 생명이 잠시 쉬어가는 겨울에도 선흘리 주변의 풍경은 푸른 생명력을 뽐낸다. 한파가 몰려와도, 많은 눈이 내려도 거짓말처럼 선흘리의 숲들은 푸르다. 그 중심에는 선흘리의 어머니라 불리는 ‘거문오름’과 ‘동백동산’이 있다.

거문오름
거문오름
10만~30만 년 전 선흘리에서 여러 차례의 거대한 화산 폭발이 일어났다. 그 때문에 해발 456m의 산체가 생겨나고 정상에는 둘레 4.5km로 무려 백록담보다 세 배나 큰 분화구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바로 거문오름이다. 그러나 화산 폭발은 거문오름에서 끝나지 않고 거대한 화산 활동의 흔적을 남겼다. 용암들이 지표면 경사를 따라 해안가로 흘러 벵듸굴에서 용천동굴, 당처물동굴까지 13km에 이르는 직선형 용암 동굴을 만들고 제주에서 가장 긴 용암협곡을 만들었으며, 용암 함몰구와 수직 동굴, 화산탄 등 다양한 용암의 흔적을 남겼다. 잘 알려진 만장굴, 김녕굴 또한 거문오름 화산 활동 때문에 만들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은 이 거대한 화산체에 수십만 년에 걸쳐 새로운 생명을 키워내기 시작했다. 그 생명은 오랜 세월 서로 의지하며 죽고 자라기를 반복해 용암이 굳은 자리에 곶자왈을 이루었다. 거문오름은 화산 활동과 생태 활동의 모태가 되는 소중한 오름이다. 누군가 말했다. ‘한라산이 제주를 만든 아버지라면 제주를 키운 어머니는 386개의 오름이라고, 그 오름의 중심에 거문오름이 있노라고.’

성산 일출봉과 달리 2007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기 전까지 거문오름의 존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거문오름이란 이름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거문’은 숲이 나무로 무성해 어두컴컴하게 보인다고 하여 붙여졌다고도 하고, 신(神)이란 뜻의 고조선 말 ‘검, 곰, 감’에서 유래한 말이라고도 한다. 실제 거문오름을 멀리서 보면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어 아름답기는커녕, 거대한 검은 숲처럼 보인다. 그 덕에 거문오름은 오랜 시간 인간과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제주 세계자연유산센터 입구
제주 세계자연유산센터 입구
제주 세계자연유산센터를 지나면 오름의 입구다. 입구부터 하늘 높이 솟아오른 삼나무 숲이 탐방객을 맞이한다. 점점 오름 품 안으로 들어가면 겨울인데도 여전히 초록잎의 나무들과 얽히고설킨 덩굴들 때문에 정오에도 초저녁처럼 어둡다. 바닥에는 초록 이끼 옷을 입은 바위들 사이로 고사리가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린다. 그 모습이 고요하다.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미야자키 하야오)의 한 장면 같다. 오름 여기저기에서 ‘풍혈’을 볼 수 있다. ‘땅의 숨골’이라 불리는 풍혈은 돌 틈의 커다란 구멍에서 수증기 같은 것이 나왔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땅이 숨 쉬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겨울에는 따스한 바람이 나온다. 거문오름 탐방로의 백미는 오름 분화구 한가운데 있는 알오름 전망대다. 거문오름 분화구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전망대를 돌아가며 보아야만 분화구를 두 눈에 담을 수 있다. 마치 거대한 성 한가운데서 세상을 바라보는 성주가 된 기분이 든다. 이 밖에도 관상수로 널리 주목받는 희귀 식물인 식나무와 붓순나무 군락지, 깊이가 35m에 이르는 수직 동굴, 용암 동굴 천장이 무너지면서 만들어진 용암협곡 등 볼거리가 많다.

거문오름 탐방은 예약제다. 1일 450명으로 제한돼 있는데, 인터넷과 전화로 예약할 수 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숲 해설사와 함께 탐방이 진행된다. 탐방로는 거문오름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정상 코스 1.8km(1시간), 분화구 내의 알오름과 역사 유적지를 볼 수 있는 분화구 코스 5.5km(2시간 30분), 분화구 정상을 완주하는 전체 코스 10km(3시간 30분)로 구분된다.

선흘 동백동산의 동백꽃
선흘 동백동산의 동백꽃
선흘 동백동산 또한 제주 생태의 원형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동백동산은 거문오름이 폭발하면서 흐른 용암 대지 위에 만들어진 숲으로 선흘곶자왈, 먼물깍 습지, 푸른 활엽수와 천연림, 화산 활동의 흔적인 동굴이 공존하는 자연생태 지역이다. 2011년 람사르 습지에 등록되었고 2014년에는 세계지질공원 대표 명소로 지정되었다. 선흘곶자왈은 제주의 곶자왈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태고의 원시림을 보는 듯 신비롭고 환상적이다. 육박나무, 백서향, 골고사리 등 육지에서 보기 힘든 수목과 식물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몇 년 전 천연림 사리오 탐방로를 만들어놓아 원시림의 매력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

선흘 동백동산으로 들어서면 그때부터 하늘을 볼 수 없다. 엄청난 수령의 원시림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나무의 잎들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며칠 전 서울에는 함박눈이 내렸다는데, 동백동산은 계절을 잊은 듯하다. 입구에서 불던 겨울바람도 숲에 막혀 잦아들었다. 이렇게 푸른 숲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바위 위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돌무더기 틈으로 온도와 숲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어 난대성 상록수가 계절에 상관없이 울창한 숲을 이룬다.

2km 정도 걸으면 갑자기 잎사귀 사이로 점점이 빛이 들어오고 하늘이 환하게 펼쳐지는데, 그때 먼물깍이 고운 자태를 드러낸다. 비경이다. 먼물깍은 곶자왈에서 흘러내린 물이 지대가 낮은 곳에 고여 형성된 일종의 연못이다. 선흘 동백동산에는 크고 작은 습지가 많은데, 먼물깍은 습지의 백미다. 습지는 수생생물에게 훌륭한 서식 환경을 제공해주는 동시에 유해 물질을 분해하고 정화한다. 그 덕에 택사, 순채, 실말, 송이고랭이, 물꼬리풀 같은 수생식물과 제주 도롱뇽, 참개구리, 누룩뱀, 소금쟁이, 물방개 등이 산다. 선흘곶자왈에는 용암 동굴이 산재해 있는데 이 중 ‘반못굴’은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제주 4·3 사건 당시 선흘리 사람들의 은신처이자 희생지였다. 당시의 역사적 비극을 조명한 영화 <지슬> 촬영지기도 하다. 동백동산을 걷다 보면 여기저기서 피어나는 ‘겨울의 여왕’ 붉은 동백꽃을 볼 수 있다. 겨울 숲에서 만나는 선홍 동백꽃은 청초하기 그지없다.

카페 세바
카페 세바
숲을 나오면 선흘마을에 있는 카페 ‘세바’를 찾아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보자. 세바는 돌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카페로 마을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덩굴이 건물을 덮고 있고 앞마당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 있어 동화 속 한 장면 같다. 가게 안은 주인장이 소장하고 있는 엘피판과 서적이 벽 한쪽을 가득 메워 분위기가 근사하다. 정기적으로 재즈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카페 블로그를 방문하면 재즈 아티스트들의 공연 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카페 근처엔 산책하기 좋은 곳이 많은데 카페 초입에 ‘불칸낭’이라 불리는 마을 수호목이 있다. 수령 500년이 넘은 나무로 멋스럽다. 선흘리가 만들어질 때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4.3 사건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948년 11월 군경이 선흘마을을 없애기 위해 나무에도 불을 질렀으나 다행히 살아남았다. 아직도 나무 한쪽에는 탄 흔적이 남아 있다. 불칸낭은 제주도 말로 불에 탄 나무를 뜻한다.

뮤지엄 라프의 동굴카페
뮤지엄 라프의 동굴카페
동백동산과 거문오름 사이에 선흘리의 또 다른 명소인 복합테마 문화 공원 ‘뮤지엄라프(다희연)’가 있다. 이곳 또한 광활한 녹차밭을 품고 있어 사계절 내내 푸르다. 녹차밭 면적만 약 20만 제곱미터로 규모가 상당하다. 녹차밭을 중심으로 레스토랑, 족욕 체험, 녹차 체험, 집라인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천연동굴 카페가 이색적이다. 천연동굴 모습을 그대로 살려 다양한 조명과 디자인 요소를 더해 이색 카페로 만들었다. 최근 가장 인기가 있는 건 ‘제주 라이트 아트 페스타(제주 LAF)’다. 빛을 매개로 한 세계적인 예술 작품들을 선보이는 아트 페스티벌로, 브루스 먼로(Bruce Munro), 장 피고치(Jean Pigozzi), 이병찬 등 국내외 작가들의 아름다운 작품을 볼 수 있다. 자연과 인공 빛이 만나 황홀한 장면을 연출한다. 마치 제주 자연에 장식한 크리스마스트리 같다.

선흘리의 아름다운 겨울 풍경을 즐기다가 늦은 오후쯤에 선흘마을 돌담길을 걷는다면 제주 여행은 더욱더 깊어질 것이다. 카페 세바에서 공연이 열리는 날이면 느릿느릿 다시 카페로 돌아와 재즈 연주를 감상해보자. 2018년의 마지막 계절 겨울이 깊어간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오직 제주만의 겨울 풍경을 품은 선흘리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건 어떨까?

거문오름: 제주 제주시 조천읍 선교로 569-36 전화_064-710-8981

동백동산: 제주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산12 전화_064-784-9446

뮤지엄 라프(다희연): 제주 제주시 조천읍 선교로 117 전화_064-782-0005

카페 세바: 제주 제주시 조천읍 선흘동2길 20-7 누리집 https://blog.naver.com/cafeseba

글·사진 문신기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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