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출신의 배우 오마 샤리프가 러시아인 의사 역으로 나온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닥터 지바고>.
[토요판] 김도훈의 불편(불평)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오마 샤리프가 죽었다. 83살이었으니 호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말년에 알츠하이머를 겪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마음이 비통하다. 나는 이 이집트 출신 배우에게 개인적인 애정이 있다. 대학 시절 담배 ‘오마 샤리프’를 열심히 피웠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그의 대표작인 데이비드 린 감독의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닥터 지바고>를 정말이지 끔찍할 정도로 사랑한다. 1970년대 몇몇 평론가들은 데이비드 린의 영화가 스타 캐스팅과 압도적인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할리우드식 스펙터클의 표본이라고 깎아내리곤 했는데, 그건 마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할리우드식 가족주의의 첨병이라며 미워하던 1980~90년대 한국 평론가들의 태도와도 흡사하다. 지금은 완전히 사라져서 박물관에서도 들을 수 없는 소리라 다시 돌아보면 좀 재미있긴 하다.
어쨌거나 나는 오마 샤리프가 연기한 샤리프 알리가 먼 사막에서 낙타를 타고 서서히 등장하던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장면은 역사상 최고의 첫 장면으로 영화 역사에 영원히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닥터 지바고>에 대해서라면 나는 한동안 조금 불편하고 어색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나는 오마 샤리프를 좋아했다. 하지만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영락없는 중동 남자가 20세기 초의 러시아 남자를 연기한다는 것을, ‘인종적/정치적 공정성’이라는 지나치게 까탈스럽고 예민한 자아가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물론 할리우드 역사에는 배우들이 타 인종을 연기한 몇몇 재미있는 사례들이 있다. 앨릭 기니스가 대표적이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로 불린 이 영국인 배우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터키의 압제에 저항하는 아랍 왕자로 분했다. <인도로 가는 길>에서는 무려 인도인을 연기했다. 더 웃기는 사례는 <8월 달의 찻집>의 말런 브랜도다. 그는 오키나와에 부임한 미군 장교와 마을 주민들을 연결하는 일본인 통역가 ‘사키니’를 연기했다. 하지만 앨릭 기니스는 스스로 온갖 괴이하고 요상하고 정신나간 캐릭터를 일부러 맡은 뒤 완벽하게 자신을 숨기는 것 자체를 즐긴 배우다. 말런 브랜도는 오히려 자기가 아무리 분장을 해도 말런 브랜도로 보인다는 사실 자체를 일종의 코미디로서 즐겼을 따름이다. 그런데 <닥터 지바고>는 좀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다. 러시아인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라면 어디에나 있다. 오마 샤리프가 캐스팅됐을 때 사람들은 할리우드 역사상 최악의 미스캐스팅이라며 떠들어댔는데, 데이비드 린은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오마 샤리프에게 지바고 역을 맡겼다. 샤리프는 백러시아인으로 분장하기 위해 하루 종일 앉아서 특수분장을 감내해야 했다. 그렇게 ‘아랍인이 영어로 연기하는 러시아 의사가 주인공인 영화’가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오마 샤리프의 이 기묘한 러시아인 연기에 대한 인종적/정치적 공정함의 기준을 누그러뜨리게 된 건 십여년 전 러시아를 방문하면서다. 러시아 친구 집에서 밥을 먹다가 누군가 <닥터 지바고>가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텔레비전에 방영된다는 화제를 꺼냈다. 나는 당연히 (그 식탁에 앉은 모든 러시아인들을 위한 정치적인 나의 공정함을 자랑하기 위해) 오마 샤리프의 러시아인 연기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째 반응이 그리 열광적이지 않았다. 내 러시아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 영화에 나오는 러시아 혁명 묘사는 전부 엉망이야. 그런데 오마 샤리프는 정말 잘했어. 정말 러시아인이라고 믿을 수 있을 만큼 훌륭해. 게다가 정말로 그렇게 생긴 러시아 사람도 많아.”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샤리프의 러시아인 연기를 불평한 건, 러시아 바깥에 살면서 러시아인들이 혹시 느낄지 모를 불쾌함을 마음속으로 미리 방어하려고 기를 쓴 외국인들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그 이후부터 색맹 캐스팅(원래 캐릭터의 인종과 관계없이 캐스팅하는 것)과 오리엔탈리즘의 함의를 뒤집어쓴 영화들에 대한 미움을 지우고 그저 맘 편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게이샤의 추억> 같은 영화가 그렇다. 실제 게이샤의 회고담을 토대로 한 원작을 영화화했다지만 <게이샤의 추억>은 일본 문화의 속살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별로 관심이 없다. 이 영화 속 교토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세트로 창조한 판타지의 장소다. 의상감독 콜린 애투드가 만든 기모노는 일본 기모노보다는 오히려 <스타워즈> 시리즈에 나오는 내털리 포트먼의 의상과 더 사촌지간에 가까울 것이다. 당연히 미국과 한국 평단은 <게이샤의 추억>이 오리엔탈리즘으로 가득한 구시대의 산물이라고 융단폭격을 보냈지만, 오히려 일본 관객이나 평단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궁리(공리)와 장쯔이, 양쯔충(양자경) 같은 중국 배우들이 기모노를 입고 게이샤를 연기하는 게 못마땅하다는 소리가 미국 쪽에서 나오자 양자경은 이렇게 말했다. “배우들은 캐릭터에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느냐에 따라 결정된 것이다. 영국 배우가 독일인이나 미국인을 연기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왜 일본인을 연기하냐는 질문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왜 일본인을 연기하냐고? 왜냐하면 나는 배우니까!”
얼마 전 나는 로맨스의 고전 <모정>을 다시 봤다. 중국인과 영국인 혼혈인 홍콩 의사가 유부남인 미국인 기자와 비극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우리 할머니들 혹은 어머니들의 눈물샘을 통째로 뽑아서 바닥에 내팽개치며 “이래도 울지 않는다면 너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부르짖었을 법한 할리우드 신파다. 그런데 이 영화는 종종 영화 역사상 가장 어색한 캐스팅 중 하나로 거론될 때가 있다. 주인공을 연기한 제니퍼 존스 때문이다. 그녀의 극 중 이름은 ‘한수인’이고, 영국 피를 갖고 있지만 완벽한 중국인으로 살아가려는 인물이며, 거의 항상 중국식 치파오를 입고 나온다. 하지만 나는 제니퍼 존스의 한수인이 정말로 아름다운 중국인이라고 생각했다. 50년대의 고풍스러운 홍콩을 배경으로 윌리엄 홀든과 사랑에 빠지는 비련의 여주인공 역을 제니퍼 존스가 너무나도 근사하게 해낸 덕이다. 물론 내가 제니퍼 존스의 육체적 아름다움에 완전히 감화됐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겠다만, 배우라는 존재에게는 당연히 육체적 아름다움이 재능이고 무기다(그래서 나는 연기력에 있어서 평가를 박하게 받는 아름다운 배우들에 대한 변명을 언젠가는 여기에 쓸 생각이다).
이제 어떤 영화를 두고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치게 고풍스러워서 거의 의미가 없는 일이 됐다. 인간 배우들이 몸에 센서를 달고 유인원을 연기하는 시대에 인종차별적인 색맹 캐스팅이라는 말도 더는 정치적으로 재미는 없다. 배두나가 얼굴에 분장을 뒤집어쓰고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영국인을 연기하는 시대다. 나는 오마 샤리프의 러시아인과, 공리의 일본인과, 제니퍼 존스의 중국인과, 배두나의 영국인을 사랑한다. 인종은 한 배우의 아바타다. 우리는 인종적/정치적 공정함을 무기로 나비 행성의 뉴런이 가득 연결된 나무를 쓰러뜨려서는 안 된다.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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