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영화·애니

‘한국적 무협’은 없다

등록 2015-08-07 18:53수정 2015-10-23 15:10

우리 것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망치는 한국영화들을 종종 본다. 중국 뻥, 일본 뻥, 할리우드 뻥을 부끄러움 없이 모조리 베껴와 대담하게 펼치는 한국적 뻥의 세계를 보고 싶다. 영화 <협녀, 칼의 기억>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우리 것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망치는 한국영화들을 종종 본다. 중국 뻥, 일본 뻥, 할리우드 뻥을 부끄러움 없이 모조리 베껴와 대담하게 펼치는 한국적 뻥의 세계를 보고 싶다. 영화 <협녀, 칼의 기억>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토요판] 김도훈의 불편(불평)한 영화
협녀, 칼의 기억
나는 사실 ‘협녀’에 엄청나게 새로운 ‘한국적 무협’을 기대한 적이 없다. 왜냐면 한국적 무협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굳이 지난 역사 속에서 ‘한국적’인 무언가를 캐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정창화 감독의 <황혼의 검객>이나, 1980년대 만들어진 홍콩 무협영화의 복제품들을 거론할 수도 있을 거다. 그 유명한 남기남 감독도 무협영화를 몇 편 만들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것들을 굳이 역사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어 ‘우리도 무협영화의 역사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안하지만, 한국적 무협영화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영화들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질이 낮다. 질이 낮은 건 그냥 질이 낮은 것이다. 질이 낮은 것이 우리 것이라고 해서 역사적인 무언가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대체 무협영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협녀, 칼의 기억>(이하 <협녀>)은 아주 간단한 해결책을 찾았다.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홍콩과 일본 무협영화의 유산으로부터 좋은 것만 가져다 쓰는 것이다. 이건 어쩌면 박흥식 감독이 무협이라는 장르 자체에 아주 숙련된 장인은 아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수도 있다. 박흥식 감독은 <인어공주>와 <사랑해, 말순씨>를 연출했던 사람이다. 스타일리스트는 아니다. 그래서 하나의 정제된 무협 스타일을 어떻게 일관적으로 끌고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는 드라마에 더 집중을 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박흥식 감독이 아주 특별한 무협액션에 대한 ‘곤조’가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그게 특별히 단점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여하튼 그렇다보니 <협녀>에는 당신이 아는 모든 무협 스타일의 클리셰가 다 들어 있다.

하나하나 따져보자. 김고은과 이경영이 대나무 숲에서 벌이는 훈련 장면은 <와호장룡>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 사실 이 영화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작품은 <와호장룡>인데 그건 흠이 아니다. <와호장룡> 이후 등장한 세상의 모든 무협영화는 <와호장룡>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니까. 전도연이 갈대밭에서 벌이는 무협과 이병헌이 거대한 궁궐 안에서 벌이는 무협은 당연히 <연인>을 비롯한 장이머우의 번드르르한 무협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드라마가 폭발하는 마지막 장면은 왕가위의 <일대종사>에서 장쯔이가 벌이던 기차역 액션이 떠오른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김고은이 궁궐로 들어가서 벌이는 액션 시퀀스는 <슈라유키히메>(한국 개봉명 <프린세스 블레이드>) 같은 일본 찬바라 영화(사무라이를 다룬 영화)에 바치는 오마주나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박흥식 감독은 찬바라 영화에 오마주를 바친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을 다시 오마주하는 이중의 오마주를 보여준다. 이쯤 되면 누군가는 이렇게 묻고 싶을 거다. ‘그렇다면 <협녀>는 한국적 무협의 자존심을 버리고 중국과 일본과 할리우드의 무협을 모조리 베낀 거냐?’고. 그렇다. <협녀>는 중국과 일본과 할리우드의 무협을 모두 베꼈다. 그러나 그건 무슨 자존심의 문제도 아니다. 자존심이라는 건 지킬 만한 자존심이 있어야 부릴 수 있는 것이다. 한국 무협영화라는 건 어차피 거의 존재하지 않음으로, 지켜야 할 자존심도 없다. 갑자기 전도연이 칼을 들고 하늘을 날다가 태극기를 펼치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려인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한다!”라고 외치는 장면을 넣지 않는다면야 말이지.

자, 다시 물어보자. 한국적인 게 뭔가. 나는 그게 뭔지 모르겠다. 한국적인 로맨틱 코미디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드라마가 허술하고 세트는 비현실적이고(혼자 서울 올라온 20대 여자의 방이 40평에 달한다거나 그런…) 배우의 옷은 모든 장면마다 바뀌는 그런 게 한국적 로맨틱 코미디인가? 한국적 액션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액션의 합을 미리 짜지 않고 그냥 카메라를 굴리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개처럼 싸우는 장면을 날것 그대로 담아내면 그게 한국적 액션인가? 한국적 호러영화는 뭔가? 10년 전에 나온 시나리오를 하나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찍으면서도 관객이 무서울 거라 생각하면서 배우가 관객보다 먼저 소리를 빽빽 지르면 그게 한국적 호러인 건가? 미안하지만 한국적인 장르영화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장르영화의 장점은 어디선가 이미 존재하는 장르의 클리셰들을 모조리 가져와 거침없이 달려갈 때 발휘된다. 봉준호의 <괴물>과 김지운의 <놈, 놈, 놈> 같은 놀라운 작품들이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박흥식의 <협녀>는 중국과 일본 무협의 모든 클리셰를 부끄러움 없이 다 가져와 터뜨린다. 여기에는 이전 한국영화들이 좀처럼 무서워서 구현하지 못했던 뻥의 세계가 있다. 물론, 참고서 역할을 한 중국 무협영화들의 뻥에는 완벽하게 다가가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고려시대를 무대로 공중을 날아다니는 뻥을 뻔뻔하게 쳐대는 담력은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장점이다.

종종 나는 ‘우리의 것’을 찾으려는 과도한 열망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망치는 한국영화들을 본다. 그건 어쩌면 한국 관객들이 ‘우리의 것은 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의 상상력을 제한한 채 극장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감독이나 제작자들도 잘 알기 때문일 수 있다. 나 역시 <협녀>의 첫 장면에서 김고은이 갑자기 10미터는 되어 보이는 해바라기를 뛰어넘어 훨훨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잠시 움츠러들었다. 아니 이건 고려시대잖아. 아무리 그 시대에 무술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기로서니 저렇게 백로처럼 훨훨 날아다니는 건 아니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스스로의 뺨을 후려치고 싶어졌다. 나 역시 역사책에서 배운 시대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협녀>의 영화적 뻥을 받아들이기를 잠깐 거부했던 것이다.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누구는 그랬다. 하도 이 국가에서 벌어지는 현실 자체가 뻥에 가까운 나머지 한국 관객들이 영화적인 뻥을 뻥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한다고. 하지만 그럴수록 한국영화는 위축되지 않고 막나가는 뻥의 세계를 관객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나는 중국 뻥, 일본 뻥, 할리우드 뻥을 부끄러움 없이 모조리 베껴와 대담하게 펼치는 한국적 뻥의 세계를 보고 싶다. 일단 뻥을 더 많이 치면 더 효과적으로 뻥을 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그 전까지는 모두가 더 대담하게 뻥을 쳐야 한다.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