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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수비드 기계’를 받아들일까 말까

등록 2015-10-30 20:06수정 2015-10-31 10:17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영화 <더 셰프>의 아담 존스는 수비드 기계를 받아들이고 별을 지켰다. 누리픽쳐스 제공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영화 <더 셰프>의 아담 존스는 수비드 기계를 받아들이고 별을 지켰다. 누리픽쳐스 제공
[토요판] 김도훈의 불편(불평)한 영화
<더 셰프>
영화 <더 셰프>는 말 그대로 셰프의 이야기다. 파리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근무하다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잠적했던 셰프 아담 존스(브래들리 쿠퍼)가 홀연히 런던에 나타난다. 그가 이루고 싶은 목표는 단 하나다.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을 만들어 화려하게 재기하는 것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는 예전에 함께 일했던 셰프, 파티시에, 레스토랑 오너, 소스 전문가 등등을 <7인의 사무라이>처럼 끌어모은다. 그러니까 이건 우리가 뭉뚱그려 ‘실패한 남자의 갱생담’이라 부를 수 있는 작은 장르의 세계 속에 속하는 영화다. 무대가 런던 레스토랑의 주방으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당연히 남성 갱생담 장르 영화들이 거의 다 그러하듯 영화의 전반부까지 아담 존스 캐릭터는 재수 없다. 고집 세고 충동적이고 뻔뻔한데다, 주방에서는 고든 램지의 유산을 이어받은 듯한 압도적 독재자다. 게다가 그는 지나간 시대의 유물 같은 남자다. 그러니까 아담 존스는, 프라이팬 세대다. 무엇이든 프라이팬에 올려놓고 버터를 끼얹어가며 전통적으로 만들던 구세대의 방식을 이어받은 천재다. 5년 만에 셰프계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뭔가 낯선 유행과 마주친다. 함께 파리에서 요리를 하던 친구는 연구실처럼 새하얗고 경건한 레스토랑을 차려놓고 분자요리(혹은 그 비슷한 것)를 하고 있다. 고기는 더이상 프라이팬에 놓고 익히지 않는다. 수비드로 익힌다.

수비드는 진공 포장을 한 식재료를 낮은 온도의 물속에서 장시간 끓여서 익히는 방식이다. 저온으로 하는 중탕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요리를 한다는 점에서 수비드는 분자요리와도 접점이 있는 요리법이고, 한국에도 5~6년 전부터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거다. 아담 존스는 직관적인 남자다. 그는 자신이 하던 방식을 고수해서 승리를 얻고 싶어하는 남자다. 그는 친구의 레스토랑에 가서 “고기를 콘돔에 넣어서 익히더군”이라며 이죽거린다. 그에게 고기는 프라이팬에 얹어서 버터를 끼얹으며 만드는 것이지 거대한 비닐팩에 넣어서 익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나는 아담 존스가 스승으로부터 배운 전통적인 요리법을 고수해 미슐랭 3스타를 얻는,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그런 결론을 기대했다.

어럽쇼. 기대는 틀렸다. 아담 존스는 수비드를 받아들인다. 소스를 담당하고 있던 셰프 스위니(시에나 밀러)는 수비드 기계를 들고 주방으로 걸어들어와서는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레스토랑 오픈 날에 요리를 망치고 자존심이 바닥까지 떨어진 채 절규하던 아담 존스는 큰 거부감 없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더 셰프>는 모두가 모두와 화해하는 꽤 착한 갱생담으로 막을 내리지만 그가 결정적으로 변한 순간은 바로 그 빌어먹을 수비드 기계를 주방에 들이는 순간이었다. 아담 존스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순간 변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그를 결국 더 나은 셰프로, 더 괜찮은 인간으로 갱생시킨다.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역사는 흐르고, 기술은 진화하고, 전통은 변화하고, 세대는 교체된다. 완강하게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권위와 품위와 존경을 동시에 잃을 가능성은 커진다. 자, 우리 모두에게는 마음속으로 수비드 기계를 들여놓아야 하는 순간이 언젠가는 온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프라이팬을 내려놓고 기계를 들여놓을 것인가? 아니면 기계를 완강히 거부하고 프라이팬으로 거기 맞설 것인가? 아담 존스는 전자를 택했다. 그리고 별을 지켰다.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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