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니 샌더스와 힐러리 클린턴의 드라마틱한 경선은 몇 년 안에 영화로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힐러리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더 빨리 제작된다는 데 내기를 걸겠다. 1992년 민주당 경선을 다루는 영화 <프라이머리 컬러스>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도훈의 불편(불평)한 영화
프라이머리 컬러스
프라이머리 컬러스
미국 경선이 이렇게 재미있었던 적은 없었다. 물론 미국 대선은 언제나 재미있었다. 세계가 조지 부시의 낙선을 강렬하게 꿈꾸며 지켜보다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미국인들의 선택에 낙담했던 조지 부시와 앨 고어의 전쟁을 떠올려보시라. 하지만 그건 대선이었다. 그 대선의 경선에서 앨 고어가 누구랑 맞붙었는지 기억나시는 분?
힐러리 클린턴과 버니 샌더스는 지금 전쟁 중이다.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박빙의 승부를 벌인 두 주자의 전쟁은 뉴햄프셔에서 샌더스가 승리를 거두면서 격해졌고, 만약 네바다에서도 샌더스가 승리를 거둔다면 정말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의 엔터테인먼트로 치달을 것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당연히 힐러리 클린턴이 경선에서 가볍게 승리해 백악관 입성을 놓고 싸울 것이라고 확신했다. 버니 샌더스가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세대)의 지지를 받기 시작하면서 판은 완전히 새롭게 시작됐다.
당연히 민주당 유권자들은 찢어질 수밖에 없다. 소득 불평등에 분노하는 밀레니얼 세대는 기존 정치권 출신인 힐러리를 믿지 못한다. 힐러리 클린턴 지지층은 샌더스가 거대한 약속을 남발하지만 실현할 방법은 모르는 몽상가라고 말한다. 경선은 과열되고, 미국 소셜미디어는 두 후보 지지자들의 설전으로 가득하다. 물론 샌더스의 말처럼 “둘 중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공화당 후보들보다는 백배 나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태평양을 건너 한국까지 끓어오르게 만드는 이번 경선은 정말이지 영화적인 경선이라고 할 법도 하다.
그러고 보니 민주당 경선을 다룬 영화가 이미 하나 존재하긴 한다. <졸업>의 마이크 니컬스가 1998년 연출한 <프라이머리 컬러스>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1992년 민주당 경선 선거운동을 다룬 영화다. 주인공의 이름은 잭 스탠턴이지만 누가 봐도 이건 빌 클린턴에 대한 영화다. 주연배우인 존 트라볼타의 능글능글한 남부 사투리와 하얗게 분장한 머리만 봐도 명확하다. 에마 톰슨이 빨간 옷을 잘 입는 금발의 똑부러지는 후보 부인을 연기하면서 힐러리 클린턴을 어느 정도 참고하지 않았을 리도 없고 말이다.
영화의 배경은 이미 힐러리와 샌더스의 두번째 대결로 유명해져버린 뉴햄프셔주 프라이머리다. 주인공인 잭 스탠턴은 남부 주지사 출신으로 민주당 후보 경선에 출마한다. 영화는 스탠턴 캠프에 참여한 한 젊은이의 눈을 통해 레이스를 바라본다. 젊고 인간미 넘치는 매력으로 유력한 민주당 대선후보로 올라선 스탠턴은 보기와는 다른 인물이다. 그는 이기적이고, 권력에 도취된 일종의 소시오패스이며, 섹스에 완전히 중독된 난봉꾼이다. 거기서부터 영화는 우리가 잘 아는 빌 클린턴/힐러리 클린턴의 이야기와 픽션을 뒤섞는다. 스탠턴의 섹스 스캔들이 터지자 캠프의 유능한 참모들은 언론의 입을 틀어막으려 애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정치놀음에 환멸을 느낀 젊은 화자가 캠프를 떠나려 하자 스탠턴이 말한다. “정치라는 세계를 좀 이해하라고. 목표는 최선을 다해 싸우는 거야. 우리는 미국인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기회를 위해 노력해야 해. 기회를 잡아야 권력을 잡을 수 있어.”
그런데 스탠턴이 최악의 인물이었을까? 아마도 그와 함께 경선을 뛴 다른 민주당 주자들도 비슷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공화당 대선주자는 두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게다가 <프라이머리 컬러스>가 끝난 뒤, 영화가 담아내지 않은 가상의 미래를 한번 상상해보시라. 스탠턴은 현실의 빌 클린턴처럼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연임을 거쳐 꽤 근사하게 대통령직을 마무리했을지도 모른다. 스탠턴의 부인은 어쩌면 그로부터 몇 년 뒤 다시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 섰을지도 모른다. 그 가상의 영화 제목은 <프라이머리 컬러스: 컬러 오브 월스트리트>라고 붙이면 근사할 것이다.
그런데 샌더스와 힐러리 클린턴의 드라마틱한 경선은 몇 년 안에 정말 영화로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당신은 샌더스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더 보고 싶겠지만 그건 인간승리의 드라마가 될 것이므로 차라리 다큐멘터리가 더 어울릴 것이다. 정치영화라는 건 원래 살짝 비꼬는 풍자의 맛이 있어야 재미가 있는 법이고, 제작비도 투자받기 용이한 법이니까 말이다. 나로서는 힐러리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더 빨리 제작된다는 데 내기를 걸겠다. 다만, 나는 아직도 고민 중이다. 그녀가 떨어지거나 당선되거나, 둘 중 어떤 경우에 이 영화가 영화적으로 더 재미있어질까?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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