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헌트>는 ‘공동체의 정의’라는 것이 죄 없는 인간을 나락으로 빠뜨리는 과정을 담아낸 영화다. 만약 당신이 ‘억울한 누명으로 고통받는 주인공’을 다루는 영화를 견딜 수 없어 하는 성격이라면 이 영화는 절대 보지 않기를 권한다. 사진은 영화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도훈의 불편(불평)한 영화
더 헌트
더 헌트
소셜미디어에 누군가가 올린 글을 봤다. ‘한때 소셜미디어에서 유명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집단적인 조리돌림을 통해 사라지는가’라는 요지의 글이었다. 그러고 보니 많은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에서 사라졌다. 누군가는 이러저러한 성추행 혐의가 불거지면서 사라졌고, 누군가는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사생활 폭로로 사라졌고, 또 누군가는 특정 이슈에 관한 의견을 개진하다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한 뒤 정신적 공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하여간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다. 이후에 그들이 법정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 적도 있다. 누구는 진행중이고, 누구는 이겼고, 누구는 졌다. 그러나 법정에서 이기고 지고는 상관없다. 그들은 어쨌든 돌아올 수 없다. 이후의 이야기는 누구도 진실로 궁금해하지 않으니까.
2013년 개봉작인 <더 헌트>는 ‘공동체의 정의’라는 것이 죄 없는 인간을 나락으로 빠뜨리는 과정을 담아낸 영화다. 이혼한 뒤 고향으로 내려간 유치원 교사 루카스는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런데 루카스의 친구인 테오의 유치원생 딸이 아주 사소한 거짓말을 한다. 루카스가 자신을 성추행한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거짓말이다. 루카스는 결백을 외치지만 마을 사람들은 소녀의 거짓말을 신뢰하며 루카스의 삶을 지옥으로 몰아간다. 만약 당신이 ‘억울한 누명으로 고통받는 주인공’을 다루는 영화를 견딜 수 없어 하는 성격이라면 이 영화는 절대 보지 않기를 권한다. 이건 그야말로 스크린에 펼쳐지는 마음의 지옥이다.
지난달 올버니 뉴욕주립대학에서는 광풍이 불었다. 흑인 여학생 3명이 버스에서 백인 남녀들에게 인종차별 욕설을 들었다고 트위터에서 주장하면서 분 광풍이었다. 여학생 중 한 명은 트위터에 “버스에 탔는데 사람들이 우리를 때리고 ‘깜둥이’라고 불렀다. 누구도 우리를 돕지 않았다. 피부색 때문에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고 썼다. 캠퍼스에서는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모두가 소셜미디어에 분노를 표했다. 힐러리 클린턴도 트위터에 ‘대학 캠퍼스에서 인종차별은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며 세 여학생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해시태그로 여학생들을 지지하는 #DefendBlackGirlsUAlbany 운동이 벌어졌다.
진상은 트위터에서의 주장과 전혀 달랐다. 경찰은 폐회로텔레비전(CCTV)을 조사했고, 세 여학생을 모욕하거나 폭행한 백인 승객은 없었으며, 오히려 백인 여학생에게 물리적인 폭행을 가한 것은 세 흑인 여학생이었다. 다른 백인 승객들은 그 여학생들을 말리려고 나섰을 따름이었다. 시시티브이가 공개되자 해시태그 운동을 벌이고 목소리 높여 지지를 외치며 시위에 참가한 사회운동가와 학생들은 거의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 피해자들의 말을 믿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으나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을 때, 당신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소셜미디어에서는 항상 사냥이 벌어진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폭로한다. 그 누군가가 누군가를 폭로하는 것을 누군가가 퍼뜨린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폭로한 것과 비슷한 것을 당했다는 사람들이 다시 누군가를 폭로한다. 사람들은 그 폭로에 대한 분노를 퍼뜨린다. 갑작스러운 대규모의 표적 사냥에 놀란 누군가는 일단 사과를 한다. 그러나 자신도 억울한 부분이 있다고 주장한다. 주장은 묵살되고, 그 주장 때문에 사과조차 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곧 소셜미디어에서 사라진다. 곧 소셜미디어 바깥에서 법정 투쟁이 벌어진다. 법정 투쟁의 결과는 소셜미디어에서의 결론과는 달랐던 것으로 밝혀질 때도 있다. 하지만 누구도 법이 내놓은 결과는 기억하지 않는다. 소셜미디어에서 뒤늦은 진실에 대한 보상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더 헌트>의 마지막 장면은 그걸 서늘하게 보여준다. 루카스의 결백은 밝혀졌다. 그러나 마을 사냥대회에 나간 그를 향해 누군가의 총알이 날아온다. 결백은 밝혀졌지만 한번 찍힌 주홍글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루카스의 눈동자가 우리를 보며 말한다. 공동체의 정의를 당신은 믿을 수 있냐고. 눈동자는 공허하다.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편집장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편집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