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축구에는 테스토스테론이 폭발하는 어떤 원초적인 스펙터클이 있다. 영화 <애니 기븐 선데이>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토요판] 김도훈의 불편(불평)한 영화
애니 기븐 선데이
애니 기븐 선데이
우연히 티브이(TV) 채널을 돌리다가 <애니 기븐 선데이>를 보기 시작했다. 미식축구 영화다. 여기까지만 듣고 ‘나는 미식축구 따위는 모르니까 패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해한다. 미식축구라는 것을 좋아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일단 도저히 룰이 어떻게 되는 건지 파악하기가 어려운데다, 현란한 기술보다는 힘이 좀 더 중요한 단순한 스포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식축구에는 테스토스테론이 폭발하는 어떤 원초적인 스펙터클이 있다. 이 지구에서 전통적인 마초라는 것이 사라지는 날이 온다면, ‘마초의 성전’은 아마도 슈퍼볼 경기장 위에 세워질 것이다.
하여간 올리버 스톤의 <애니 기븐 선데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 역시 미식축구라는 스포츠를 그대로 빼닮아서 꽤 우직하고 단순하다. 구단주는 이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감독은 한 게임 자체를 소중히 여기고, 둘은 갈등하고, 그러나 스포츠 정신 아래서 결국 봉합된다. 결국 ‘일요일에 뛰는 경기일지언정 후회 없이 열심히 뛰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아주 상식적인 영화인데, 그 상식 자체가 진부하지만 근사하기 때문에 가슴이 살짝 벅차오르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어쩔 도리 없이 나의 1994년을 떠올렸다. 올리버 스톤의 미식축구 영화와 1994년이 대체 어떻게 연결되느냐고?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1994년은 꽤 재미있었다. 어딘가 위험해 보이는 책을 끼고 저녁에 나가 학회를 하던 87학번 선배와, ‘저 형과 누나들은 올림픽이 코앞인데 왜 무섭게 화염병을 던지고 그럴까’라고 의아해하며 87년을 보낸 94학번들이 함께 학교를 다녔다. 94학번들에게 한국은 이미 민주적인 국가였다. 87학번들에게 민주화는 아직 제대로 오지도 않은 것이었다.
당시 94학번들은 세대를 하나로 묶어 물건을 팔기 좋아하는 기업들에 의해 ‘엑스세대’로 묶인 나이였다. 이상할 정도로 모두가 이 세대를 싫어했다. 이를테면 꽤 사회파적인 열혈 교수는 수업을 하다가 책을 집어 던지더니 우리를 향해 뭔가 타깃이 정확하게 없는 화풀이를 시작했다.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나는 그의 화풀이는 다음과 같다. “뭐? 마음 울적한 날에 거리도 걸어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한 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도 간다고? 웃기고들 있네. 이래서 니네 엑스세대가 안 되는 거야!” 정말이다. 그는 정말로 마로니에의 히트곡에 치를 떨면서 저 말을 했다.
그 세대도 운동을 했다. 학과 친구 한 명은 87학번 선배를 따라 열심히 학회를 다니고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도 학교 정문에서 화염병과 최루탄이 날아다니는 시위는 간헐적으로 존재했다. 문제는 이 친구가 미식축구부에 들어가기로 하면서 발생했다. 우리는 축하했다. 캬. 미식축구라니. 그렇게 남성적으로 멋진 스포츠가 또 어디 있겠어. 가랑이에 차는 기어조차도 근사해 보였다. 87학번 선배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친구를 학과실에 앉혀놓고 말했다. “민족운동을 하는 사람이 제국주의의 스포츠를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친구는 어리둥절한 채 말했다. “아니, 이 운동은 운동이고 저 운동은 저 운동이잖아요.” 선배는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 친구는 그것이야말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라고 했다. 두 이치가, 두 세대가, 두 세계가 1994년의 학회실에서 격돌하고 있었다. 친구는 곧 운동을 그만뒀다. 아니, 미식축구는 그만두지 않았다. 아마 그 친구가 이 운동을 그만두고 저 운동을 택한 순간, 세상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결국 어떤 세대가 이긴 거냐고? 알 파치노는 <애니 기븐 선데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결국 이기거나 질 것이다. 중요한 건 남자답게 이기느냐, 남자답게 지느냐다”(이걸 좀 덜 마초적인 표현으로 바꾸자면 ‘품위 있게 이기느냐 지느냐’ 정도겠다). 요즘 나는 총선이 끝나고 누가 품위 있게 이기고 품위 있게 졌는지를 파악하려 꽤 애를 쓰고 있다. 아직까지는 미 제국주의 스포츠의 결승전에서처럼 품위 있는 승자와 패자는 나오지 않은 것 같다.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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