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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세상엔 ‘수저’ 외의 것들도 있으니

등록 2016-05-13 19:11수정 2016-05-16 10:27

[토요판] 김도훈의 불편(불평)한 영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는 이민에 성공해 부를 쌓은 집안 출신의 파키스탄 남자와 노동계급인 ‘잉글리시’ 남자의 사랑을 그린 퀴어영화다. 백두대간 제공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는 이민에 성공해 부를 쌓은 집안 출신의 파키스탄 남자와 노동계급인 ‘잉글리시’ 남자의 사랑을 그린 퀴어영화다. 백두대간 제공
런던이 역사상 최초로 무슬림 시장을 선택했다. 런던이 파키스탄계 무슬림 영국인인 사디크 칸을 시장으로 선택한 것은 정말이지 기념비적인 일이다. 다만, 나는 그가 시장으로 당선되던 날 한국 미디어들의 보도를 흙을 씹는 기분으로 읽었다. 대부분의 미디어는 그를 ‘흙수저’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게다가 흙수저는 ‘흙수저’라고 강조하고, 무슬림은 그냥 무슬림이라고 썼다. 그건 사디크 칸의 종교보다는 그의 어린 시절 경제적 계급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정말?

따지자면야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사디크 칸은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8남매 중 하나로 태어났다. 침실 3개짜리 공공주택에 살면서 공립학교를 나왔다. 아버지는 버스기사였다.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이후 사디크 칸은 법학을 전공하고 인권변호사로 일한 다음 2005년 하원 선거에서 승리해 정치인이 됐다. 고든 브라운 시절에는 지방자치부 장관도 했다.

물론이다. 사디크 칸의 런던 시장 승리를 노동계급의 승리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승리는 흙수저가 아니라 ‘무슬림’에 더 강력한 방점이 찍혀야 한다. 사디크 칸의 당선이 놀라운 건 신문 배달하던 노동자 청년이 입신양명했기 때문이 아니라, 반이민자 정서와 인종주의가 거센 2016년의 유럽에서 ‘무슬림’으로서 시장에 당선이 됐기 때문이다. 흙수저의 인간 승리 드라마로 이걸 포장하면, 보수당 정권 아래 있는 지금 영국에서 무슬림 출신 시장을 선택한 런던의 메시지는 흐려진다.

애초 ‘금수저 흙수저론’은 지금 한국의 젊은 세대가 만들어낸 풍자의 용어였다. 미디어가 ‘부잣집 출신은 금수저, 노동자 출신은 흙수저’로 나누어 세상을 아주 편리하게 분리하라고 나온 용어가 아니다. 사디크 칸의 성공을 흙수저의 성공으로 찬양하는 순간, 훨씬 더 다양한 변수들이 작용한 런던 시장 선거를 가히 한국적인 레토릭으로 하락시킨다. 사디크 칸의 가장 큰 숙적이 보수당이 아니라 노동당 내부의 반유대주의였다는 것은? 사디크 칸이 실은 강경 좌파 노동당 대표인 제러미 코빈과 상당히 다른 성향을 가진 중도 좌파라는 건?

사디크 칸을, 양향자를, 경제적인 계급을 극복하고 성공한 정치인들을 ‘흙수저’라고 표현하는 순간, 그것은 어떤 면에서 ‘금수저가 되고 싶다면 입신양명하고 돈을 많이 벌어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전 세대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 속에서 허덕이는 세대가 스스로를 자조하며 일컫는 단어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스템 속에서 성공한 사람들에게 붙이는 것은 그 단어를 만들어낸 세대에 대한 모욕에 가깝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1980년대 영국 영화 중 하나는 스티븐 프리어스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다. 파키스탄 남자와 잉글리시(영국인이 아니라 잉글리시다. 여기서도 디테일은 중요하다. 영국인이라는 단어에는 스코티시와 웰시 등이 모두 포함되니까) 남자의 사랑을 다룬 퀴어영화다. 그런데 이건 그리 단순한 함의를 지닌 영화가 아니다. 잉글리시 남자는 노동계급이고, 파키스탄 남자는 오히려 이민에 성공해 부를 쌓은 집안 출신이다. 영화 속에서는 대처 총리에게 동조하며 잉글리시 노동계급을 깔보는 성공한 파키스탄 이민자도 등장한다. 스티븐 프리어스는 섹슈얼리티뿐만 아니라 경제와 계급 등 모든 면을 전복시킨 다음 다시 한번 영국을 들여다보라고 관객들에게 제언한다. 이것은 균형 잡기가 아니다. 원래 세상은 둘로 쪼개어서 나눌 수 없는 것이고, 영화도 그것을 반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그 억센 주먹으로 기계를 멈춰 역사를 열라고만 노래해야 하는 시대는 어쩌면 지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억센 주먹으로 기계를 멈춰 역사를 열어야 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고운 손으로 지하철 문을 열어 욕을 퍼붓는 어버이들 사이에서 임산부석을 사수하며 역사를 열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와 인종적 편견에 부딪히면서도 거대한 도시의 진보적인 흐름을 사수하며 역사를 열어야 한다. 세상에는 계급 이외의 것들도 있다.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가 흙수저와 금수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듯이, 사디크 칸의 런던 시장 당선도 흙수저의 성공담이 아니다.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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