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성의 ‘노란 옷을 입은 여인’(1934) 대구미술관 제공
“스스로를 검열하지 말아라. 너 자신을 그리하지 않아도 너희는 지나치게 착한 아이다.”(2003년 진덕규 이화여대 교수) 한때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던, 여성이 이 사회를 살아가기 쉽지 않음에 대한 조언이다. 그 말이 이해되기까지 졸업 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슬프게도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바다. 20세기 초의 조선과 2023년 여성의 표상은 어떠할까. 근대의 구상화가 이인성과 동시대 작가 정수정의 작품 속 여성에게 말을 걸어본다.
‘또각또각’ 소리가 들릴 듯하다. 최신 유행의 원피스를 사러 가고 싶다. 1934년에 그려진 인물화에 대한 감상이다. 세련된 노란 원피스에 눈길이 머문다. 디테일을 살린 소매에 단추 장식은 귀여움을 뽐낸다. 비스듬히 쓴 흰색 모자와 벗겨질 듯 신고 있는 슬리퍼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노란 옷을 입은 여인’은 이처럼 ‘힙하다’. 누굴까. 일제강점기에 이토록 생기 넘치는 그림을 그린 이가. 싱그러움을 품은 여주인공이. 바로 조선이 낳은 화단의 귀재로 불리는 이인성(1912~1950)이다. 모델은 그의 아내 김옥순이다.
이인성을 설명하는 수식어는 화려하다. 그는 ‘공모전 스타’였다. 17살 때인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하고 스무살엔 특선을 했으며 일본 제전에서도 수상했다. 보통학교(초등학교)도 늦게 입학했고 중학교 진학도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으나 그림에 대한 재능은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대구 출신인 그는 주변의 도움으로 일본 다이헤이요(태평양) 미술학교에 진학했다. 스스로 꽃피운 기량이었고 세상은 그의 재능에 답했다.
‘노란 옷을 입은 여인’ 속 여인의 다리를 꼬고 있는 자태에는 편안함이, 턱을 괴고 비스듬히 바라보는 시선에는 당돌함이 새어나온다. 생기를 품은 눈동자와 새초롬한 표정.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모델에 대한 애정과 자랑스러움을. 이인성은 유학 시절 김옥순을 만났다. ‘신여성’이었고 대구 지역 유지의 딸이었다. ‘노란 옷을 입은 여인’은 연애 시절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34년 이인성은 일본의 제전과 조선의 선전을 휩쓸었다. 가난한 고학생은 신여성과의 사랑을 쟁취했다. 찬란했고 영화로웠다.
인생은 언제나 예측 불허다. 동화 같은 사랑은 자주 비극을 예고한다. 아들과 딸을 잃었고 1942년 김옥순과 사별했다. 이후 그림 속 여성의 눈은 자주 감겼다. 본능적인 색채구성과 과감한 표현력. 그의 기량에 토를 다는 이는 없다. 일제 주도의 관전에 적극 참여해 명성을 얻었기에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인성이 기댈 곳은 자신뿐이었다. 누구도 한 사람의 인생을 쉽게 평가할 자격은 없다. 온몸으로 시대의 주름을 만지며 붓 하나로 조선의 향토와 정서를 치열하게 그린 화가였다.
이인성에게 영예를 가져다준 선전의 수상작보다 ‘노란 옷을 입은 여인’이 그가 가장 기쁘게 그린 그림이 아닐까. 이인성은 한국전쟁 중 총기오발 사고로 세상을 뜬다. 1950년 그의 나이 38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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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정의 ‘뿔 Horn’(2023). 정수정·에이라운지 제공
‘이 그림이 리얼리즘 회화라고?’ 작품과 전시 타이틀이 어긋나 보였다. 지난 6월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라는 제목에 이끌려 들른 일민미술관에서 본 정수정 작가의 작품에 관해서다. ‘뿔 Horn’(2023) 속의 여성은 ‘신화 속에서나 존재할 듯한 여주인공’이라 말하고 싶다. 채도 높은 색들의 엉킴이 긴장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하늘에 떠 있는 고래를 연상케 하는 생명체. 기이한 문양의 장막 같은 천으로 분할된 화면. 질서 없이 흐트러진 이미지들이 혼란스럽다. 오묘함을 더하는 건 여인의 자세다. 측면으로 돌아 눈을 감고 피리를 불고 있다. 정적인 듯 동적이다.
‘여성일까 소녀일까?’ ‘환상일까 현실일까?’ ‘어떤 감정으로 피리를 부는 걸까?’ ‘뿔 Horn’ 속 소녀의 감정도 복잡해 보인다. 다시 보니 작은 나비인 줄 알았던 생명체는 애벌레였다. 틀이 깨진다. ‘그냥 내 식대로 해석하지 뭐’라는 결론을 내버렸다. 소녀의 감은 눈과 위로 향하고 있는 고개와 손짓만으로도 삶의 동력이 느껴진다. 마법 같고 우아하다.
정수정은 가천대 회화과와 영국 글래스고 예술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신진미술인 지원 프로그램으로 열린 개인전을 비롯해 오씨아이(OCI) 미술관 영크리에이티브 작가로 선정되는 등 주목받고 있다. 얼핏 상상력과 고전 신화에 기대는 회화 같지만 다시 보면 현실 속 다양한 여성을 그려냈음을 깨닫게 된다. ‘일상이 아니지 않냐’고 반문할 것인가. 정수정은 통쾌하게 답하고 있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설정하는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다고.
“나의 욕망과 야망을 인정하고 싶다.” 정수정이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다. 모험심이 강한 자신을 좋아하지만 가끔 주눅 들고 눈치 보는 상황들에 잘 맞서고 싶다고. 씩씩하고 전투적인 여성을 그리는 이유다. 이제 알 것 같다. 신비로움이 물씬 묻어나는 그의 회화가 생생한 현실로 다가오는 이유는 솔직함 때문이라는 것을.
회화의 매력을 더하는 건 붓의 쓰임이다. 정수정은 이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칼을 휘두르는 듯 거칠다. 때로는 섬세하고 세밀하다. 겹쳤다가 흩트리고 쌓았다가 풀어놓는다. 즉흥적인 붓놀림은 채색의 리듬감을 살려낸다. 인체의 움직임은 자유로워지고 미묘한 감정이 살아난다. ‘뿔 Horn’ 속 주인공의 팔에는 괴이한 털이 피어나고 있다. 비밀스러움은 불완전함과 맞닿아 있다. 그녀의 캔버스 속 여성들은 불안을 회피하기보다 끌어안는다. 진정한 리얼리즘이 여기에 있다.
‘단발’은 이인성이 그려낸 1934년 신여성과 2023년 정수정이 그려낸 소녀의 공통점이다. 머리 모양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여성에게 조금만 더 다정하기를.
미술 칼럼니스트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소심하고 예민한 기질만 있고 재능이 없단 걸 깨달았다. 모네와 피카소보다 김환기와 구본웅이 좋았기에 주저 없이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전공했다. 시대의 사연을 품고 있는 근대미술에 애정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