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펼쳐진 ‘한국근현대서예’전 1층 전시장. 기운 넘치는 필획으로 <명심보감> 글귀를 써내려간 권창륜 서예가의 대형 글씨 작품이 보인다.
코로나19 사태 확산으로 국내 주요 전시시설 대부분이 문을 닫은 가운데, 국내 최대 규모의 미술전시기관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무관객’ 기획전이 사상 처음 막을 올린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개관한 이래 처음으로 서예 분야를 집중 조명하는 기획전 ‘미술관에 서(書): 한국 근현대 서예’를 오는 30일 오후 4시부터 온라인 공간에서 먼저 개막하기로 했다고 26일 밝혔다. 올해 미술관의 첫 기획전이기도 한 이 전시는 지난 1년여간 준비 과정을 거쳐 이달 초 산하 덕수궁관 전관 전시장에 작품 설치를 마친 상태다.
미술관 쪽은 “자체 유튜브 채널(youtube.com/MMCA Korea)을 통해 기획전 주요 출품작과 세부 얼개를 담은 녹화 영상에 전담 큐레이터인 배원정 학예사의 해설을 덧붙여 90분짜리 온라인 개막 프로그램을 내보낼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애초 이달 12일 덕수궁관에서 공식 개막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사태가 이어지면서 지난 2월 말 국공립 문화예술기관들이 휴관하자 계속 날짜를 미뤄왔다.
국립미술관이 기획전시 콘텐츠를 가상공간인 온라인에서 먼저 공개하며 개막을 알리는 것은 미술관 51년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다. 휴관 장기화로 전시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책으로 보인다. 실제로 윤범모 관장은 “코로나 사태에 대한 정부 대응이 심각 단계로 격상돼 실제 전시장은 당분간 공개할 수 없게 됐다. 마냥 개막을 미루는 것은 곤란해 학예실 쪽과 논의를 거듭한 끝에 일반 관객을 위한 온라인 개막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시 작품과 감상 동선의 세세한 부분을 동영상을 통해 보여주고, 전시 담당 기획자가 출품작을 돌며 상세한 해설까지 곁들이므로 실제 관람 못지않은 감상 체험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시장에 나란히 나온 조각가 김종영의 추상조각 <65-2>와 화가 이응노의 그림 <생맥>. 추사 글씨에서 영감을 얻은 김종영의 조각과 서구 추상표현주의 영향과 전통 서예의 기운생동한 표현이 한데 녹아든 이응노의 그림이 색다른 대비를 보여준다.
MMCA 유튜브 채널의 학예사 전시투어 예고 영상중 일부분.
‘한국 근현대 서예전’은 근현대 미술사에서 서예의 위상과 정체성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대가들의 명작을 통해 재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추사 김정희 등 조선시대 대가의 명작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한국 서예가 근대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선전)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를 거치며 현대 예술로 새롭게 변모해가는 과정을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해방 뒤 한국 서예판의 기틀을 만들고 다진, 이른바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1세대 명인 작가 12인의 대표작이 역대 처음 한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추사의 걸작 <세한도>를 태평양전쟁 때 일본 소장가한테서 얻어 환수한 일화로 유명한 소전 손재형, 형제 서예가로 각기 독창적인 서법을 일구며 시대를 풍미한 일중 김충현·여초 김응현, 생동하는 조형 정신을 서예에 불어넣은 검여 유희강 등이 전서, 예서 등 한자의 다섯 글씨체를 자유자재로 표현한 작품이 총망라돼 나왔다.
초정 권창륜 등 1세대 대가의 맥을 이은 2세대 후배 서예가들의 수작도 다수 모였는데, 갈물 이철경, 평보 서희환 등 대가들의 작품 10여 점은 최초로 공개된다는 점에서 뜻깊다. 추사의 전위적 글씨에서 영감을 받은 김종영의 추상 목조각과 전통 서예의 조형 정신과 서구 추상화풍이 융합된 듯한 이응노의 <생맥>, 황창배의 글자 추상 등 서예와 연관된 화가들의 명작과 요즘 광고나 티브이 프로그램 제목 글씨 등에 쓰이는 타이포그래피, 캘리그라피 수작들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