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은 숨을 죽였다.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의 고요함도 잠시, 무대에선 스페인 작곡가 호아킨 로드리고의 ‘아란후에스 협주곡’이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한국방송>(KBS2)의 <토요명화>(1980년 12월~2007년 11월)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된 바로 그 곡이다. “빠라밤~ 빠라바라바라 빠라밤~.” ‘그때 그 시절’ 안방극장 앞에 모인 시청자의 가슴을 뛰게 한 선율이 무대에서 흐르자 객석의 긴장감은 이내 한편의 영화를 기다리는 듯한 설렘으로 변해갔다.
지난 16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음악문화공간 스트라디움에서는 특별한 공연이 펼쳐졌다. ‘스테이지30’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오직 30명’만을 위한 소규모 공연이다. 8명의 연주자로 꾸려진 ‘하림과 블루카멜앙상블’이 아랍·발칸풍의 음악에 한국 음악을 섞은 실험적 무대를 선보이자, 객석에서는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공연은 7월10일까지 매주 금요일 열린다. 앞으로 남은 일정은 재즈·클래식 등으로 채워질 예정이다.
음악문화공간 스트라디움이 7월10일까지 여는 ‘스테이지30’ 공연에서 ‘하림과 블루카멜앙상블’이 무대에서 연주를 하고 있다. 스트라디움 제공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거리두기 속 관객과 마주하는 대면 공연 방식에도 ‘뉴노멀 현상’이 감지되고 있다. 관객을 소규모로만 받는가 하면, 오케스트라 공연에서는 악기 편성을 줄이거나 연주자 사이에도 거리두기를 하는 등의 작지만 새로운 시도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 공연의 진화를 이끌고 있다. 무대 위 연주자에게 뜨거운 함성을 보내며 객석이 열광하는 전통적인 콘서트 개념도 바뀌는 분위기다.
‘스테이지30’을 주최한 스트라디움 쪽은 100석 규모의 공연장에 30석의 관객석만 마련했다. 객석 거리두기를 위해서다. 관객은 마스크를 끼고 체온을 잰 뒤, 문진표를 작성했고, 손을 소독한 뒤 공연장에 들어섰다. 공연 중에도 마스크를 벗지 않고, 함성을 지르지도 않는 등 개인 방역에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이병수 스트라디움 대표는 “코로나19 사태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수개월째 이어지면서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을 위로하고, 침체한 공연계를 되살리기 위해 기획했다”고 밝혔다.
공연기획사 봄아트프로젝트가 30명 규모로 진행하는 ‘방구석 탈출 클래식’ 공연. 봄아트프로젝트 제공
공연기획사 봄아트프로젝트도 30명 규모의 살롱 공연을 진행 중이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복합문화공간 ‘오드 포트’에서 지난 6일 시작해 7월25일까지 토요일마다 이어지는 ‘방구석 탈출 클래식’ 공연은 관람객을 30명만 받는다. 통제 가능한 범위에서 대면 공연을 하려다 보니 규모를 축소한 것이다. 특히 오프라인 공연인데도 온라인 채팅방을 마련해 현장에서 관객이 직접 이야기를 하지 않고도 예술가와 소통할 수 있도록 했다.
‘관객 30명’ 공연이 가능한 것은 기획사와 예술가가 단기간의 금전적 이익에 매몰되지 않아서다. 이병수 대표는 “관람객이 30명이다 보니 입장료 수익은 130여만원에 불과하다”며 “자체 공연장을 이용한데다, 30명의 관객을 위해 8명의 아티스트가 사실상 ‘재능기부’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공연이었다”고 설명했다. 봄아트프로젝트의 윤보미 대표도 “공연장은 후원을 받아 마련했고, 아티스트도 개런티(출연료)를 대폭 낮췄다”고 말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이 지난 18~19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연 ‘오스모 벤스케의 말러와 시벨리우스’ 공연. 연주자 구성을 최소화하고, 연주자들이 1.5m 이상 띄어 앉는 무대 위 거리두기를 했다. 서울시향 제공
객석뿐 아니라 무대 위에도 ‘새로운 표준’이 등장하고 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이 지난 18~19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연 ‘오스모 벤스케의 말러와 시벨리우스’ 공연이 대표적이다. 지난 2월21일 이후 넉달 만에 처음으로 대면 공연을 연 서울시향은 ‘무대 위 거리두기’를 시행했다. 연주자들은 1.5m 이상 띄어 앉았고, 특히 현악기 연주자는 마스크를 착용했다. 2명이 함께 쓰던 보면대(악보를 펼쳐 놓는 대)도 개인별로 비치했다. 마스크 착용이 어려운 관악기 연주자 주변에는 투명 방음판도 세웠다. 편성도 최소화했다. 1부에선 50명가량이 무대에 올랐다. 오스모 벤스케 음악감독 취임 이후 지난 2월 연 첫 연주회에서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연주에 합창단까지 200명을 무대에 세운 것과 견주면 단출해진 구성이다. 특히 2부에서는 규모를 지휘자 포함 16명으로 더욱 줄였다. 김진영 서울시향 대리는 “관객의 안전과 함께 연주자의 안전도 중요하다”며 “기존에 예정된 국외 연주자가 코로나19 확산으로 한국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겹치면서 오케스트라 편성을 앙상블 수준으로 재편했다”고 말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이 지난 18~19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연 ‘오스모 벤스케의 말러와 시벨리우스’ 공연. 현악기 연주자는 마스크를 착용했고, 마스크 착용이 어려운 관악기 연주자들 주변에는 투명 방음판을 세웠다. 서울시향 제공
공연장에 간호사 등을 배치하는 콘서트도 열린다.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는 7월3일부터 19일까지 서울 용산구 노들섬 라이브하우스에서 ‘이른 열대야’ 공연을 선보인다. 보건학을 전공하고 10여년 전 간호사로 활동한 멤버 잔디는 “공연 때마다 객석 거리두기는 물론, 방역 전담 의료인을 배치하고 접촉을 줄이기 위해 온라인 문진표도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일상이 멈춰선 가운데 철저한 방역에 기반을 둔 공연 실험이 움트면서 지친 관객과 예술가들은 환영하고 있다. 지난 16일 ‘스테이지30’ 공연에서 만난 조아무개(49)씨는 “솔직히 불안하기도 했지만, 매일 방역이 이뤄지는 공간에서 관객은 모두 마스크를 낀 채 침묵 속에서 공연을 관람하기 때문에 공연장이 식당보다 오히려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라이브 공연을 통해 이후 다시 거리두기를 이어갈 수 있는 힘을 얻은 것 같다”고 말했다. 가수 하림은 “연주자는 관객과 교감하며 큰 에너지를 받는데, 코로나19로 공연을 못 하니 집단 우울증에 빠진 것 같다”며 “음악을 통해 많은 이들이 감정적으로 치유될 수 있도록 다양한 실험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