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주명철의 프랑스 역사산책
⑩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교회
혁명 직전에 구체제 지키려
루이 16세, 수비대 병사에게 발포령
이를 거부한 사병 11명
수도원 아베이 감옥에 수감되자
시민들이 구출해 혁명 불댕겨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6세기 건립
중세 땐 지역에 대한 사법권 행사
소속 법원과 독자 감옥까지 갖춰
1792년엔 9월학살 벌어진 장소
⑩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교회
혁명 직전에 구체제 지키려
루이 16세, 수비대 병사에게 발포령
이를 거부한 사병 11명
수도원 아베이 감옥에 수감되자
시민들이 구출해 혁명 불댕겨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6세기 건립
중세 땐 지역에 대한 사법권 행사
소속 법원과 독자 감옥까지 갖춰
1792년엔 9월학살 벌어진 장소
558년에 완공된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은 프랑스혁명 직전에 시민들과 수비대 병사들의 우애가 싹튼 곳이기도 하다. 시민들에 대한 발포 명령을 거부한 병사들이 수도원 감옥에 갇히자 시민들이 감옥을 강제로 열어서 이들을 풀어줬다.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모습. 위키미디어
노르만족 침입 때 약탈당해 뤼 데 시조의 북쪽으로 나가면 오른쪽에 계몽사상가 디드로의 동상이 있는데 중세에는 그 근처에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한다. 디드로 동상과 생제르맹데프레 교회 사이에 있는 생제르맹 대로는 시테섬 동쪽에 있는 생루이섬 남쪽에서 시작해서 콩코르드 다리까지 길이가 3.15㎞에 너비가 30m 이상이다.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이 센강 좌안에서 얼마나 번성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511년에 클로비스가 죽은 뒤에 네 아들(티에리·클로도미르·실드베르·클로테르)이 프랑크 왕국을 나눠 가졌다. 셋째인 실드베르는 에스파냐의 사라고사에서 서고트족과 싸우고 황금십자가와 에스파냐의 순교자 비센테(304년 순교)의 옷을 가지고 542년에 돌아왔다. 그는 곧바로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을 세웠다. 센강 강북의 수도원들은 북쪽의 언덕과 산에서 흐르는 여러 갈래의 시냇물이 모이는 질척한 땅을 메우고 세웠다. 강남에서도 센강으로 흘러드는 비에브르천(또는 고블랭천)의 오른쪽은 늪지였기 때문에 서쪽의 풀밭(des prés)에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중세의 거리 30곳과 그르넬 벌판의 일부에 사법권을 행사했다. 수도원 소속 법원에 판사·검사 한명씩, 서기 두명, 군대, 죄인 공시대(pilori, 죄인을 묶어두던 곳), 감옥을 가졌다.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남쪽 측면. 위키피디아
두려움에 반혁명분자 학살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감옥인 ‘아베이 감옥’(prison de l'Abbaye)은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1522년에 옛 건물을 헐고 새로 지었다. 그리고 1635년에 수도원 남동쪽 담장 밖에 3층 건물을 새로 지었다. 1667년에 루이 14세는 파리 치안총감직을 신설하고 라 레니를 임명했다. 라 레니는 도둑이 숨을 곳을 없애려고 파리에 가로등을 설치한 인물이다. 1674년에 루이 14세는 오직 공권력만이 사법권을 행사하라고 명령했다. 아베이 감옥은 명령불복·군무이탈의 죄를 지은 장교와 사병을 가두는 왕립감옥이 되었다. 1789년 5월에 베르사유에 모인 전국신분회가 6월17일에 국민의회를 선포하고, 20일에 의원들이 헌법 제정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는 죄드폼의 맹세(일명 테니스코트의 서약)를 하자, 루이 16세는 군대를 파리와 베르사유에 집결시켜 구체제를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 수비대 병사들은 평소 파리 주민들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부족한 급료를 보충하려고 휴무일에는 민간인과 어울려 일하면서 용돈을 벌었는데, 어찌 민간인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있겠는가? 군당국은 발포 명령을 무시한 병사 11명을 아베이 감옥에 넣었는데, 6월30일에 파리 주민들이 아베이 감옥을 강제로 열어서 병사들을 구해주고 ‘우애’를 과시했다.
반혁명분자들의 역공을 우려해서 1792년 9월 저녁에 감옥의 죄수 등 1천명 이상을 살해한 ‘9월학살’을 그린 그림. 출처는 영국 작가 타이 홉킨스의 책 <옛 파리의 지하 감옥>. 위키피디아
유명인들의 단골 카페 ‘레 되 마고’ 옛날에는 갤리선의 노 젓는 형벌에 처하거나 지방으로 유배하기 전에 죄인을 말뚝에 묶어놓고 온갖 조롱·저주를 견디게 만들었다. 그를 불쌍히 여겨 노잣돈을 던져주는 이도 있었다. 이 말뚝을 죄인 공시대라고 불렀다. 왕의 죄인 공시대는 강북의 레알(Les Halles) 시장 근처에 있었다. 수도원의 죄인 공시대는 혁명 뒤에 원래 이름을 찾은 ‘붉은 십자가 오거리’에 있었다. 오거리에는 행인이 많았기 때문에 삯마차가 줄지어 서 있었고, 행상인이 소리치며 다녔다. 공권력에 불만인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기도 했다. 이 오거리에는 2005년부터 조각가 세자르(1921~1998)의 ‘상토르’(켄타우로스)가 서 있다. 2006년 7월9일에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오거리 이름을 ‘미셸드브레 광장’으로 바꾸었다. 드브레(1912~1996)는 1958년부터 법무장관을 지내면서 공화국 헌법의 기초를 세웠고, 1959년에 총리가 되었다. 샤를 드골 시대의 영광을 되살리고 싶은 정치인 시라크가 드브레에게 광장을 바쳤다.
생제르맹데프레 교회 앞 광장 입구에 있는 카페 ‘레 되 마고’. 1873년에 문을 연 이 카페는 앙드레 지드, 장폴 사르트르 등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위키미디어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입구. 위키미디어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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