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 직후인 1668년의 베르사유궁 모습. 프랑스 화가 피에르 파텔의 작품. 위키피디아
루이 14세는 파리 서쪽의 유서 깊은 생제르맹앙레성에서 태어나 다섯살인 1643년에 등극했다. 그는 모후와 총리대신 마자랭 추기경의 보호를 받으면서 30년전쟁의 혼란기를 넘기자마자 프롱드난을 겪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루브르궁에서 편히 지내지 못하고 뱅센성이나 생제르맹앙레성으로 옮겨다녔다. 그는 지긋지긋하게 반항적인 파리에서 빨리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자랭은 뱅센성을 후보지로 생각하다가 죽었는데, 루이는 세살 때 전염병을 피하려고 잠시 머물던 베르사유 별궁을 기억해냈다.
루이 14세는 파리 남서쪽 20㎞에 있는 베르사유에 새 궁전을 짓기로 했다. 건축가 루이 르보는 왕이 원하는 궁전의 모습을 설계에 꼼꼼히 반영했다. 르보가 1670년에 죽은 뒤 아르두앵 망사르가 공사를 마무리했다. 특히 망사르는 1678년부터 1684년까지 매혹적인 ‘거울의 복도’(Galerie des Glaces, 왜 복도를 ‘방’이라고 옮기는지 모르겠다)를 완성했다. 샤를 르브룅이 실내장식을 맡았고, 앙드레 르노트르가 정원을 꾸몄다. 우리는 당대 최고였던 이들의 실력을
보르비콩트와
샹티이 편에서 보았다.
베르사유궁 부지에 편입한 농가들을 헐고, 수많은 분수와 폭포와 운하를 포함해서 궁의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우선 파리에서 쓰고 남는 물을 끌어갔다. 첫 삽을 뜬 지 20년이 지난 시점에도 공사가 끝나지 않았지만, 왕은 1682년 5월 생제르맹앙레궁을 떠나 베르사유궁으로 이주했다. 방대한 시설과 거주 인원에 비해 물이 부족했다. 이에 1684년부터 북방 7㎞에 거대한 마를리 기계(Machine de Marly)를 설치해서 센강 물을 비탈길로 밀어올렸다. 첫 단계에 177m, 둘째 단계에서 2200m를 밀어올린 물을 수조에 모은 뒤, 마를리궁에 나눠주고, 루브시엔 수도교로 베르사유궁에 공급했다. 필요시 맹트농 수도교로 루아르강 물을 끌어다 쓰려는 계획도 마련했다.
베르사유궁은 지대가 높아서 물 공급이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베르사유궁에서 9㎞ 떨어진 센강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수력 펌프인 마를리 기계를 설치했다. 1722년 마를리 기계의 원경을 장바티스트 마르탱이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마를리 기계의 수차와 이를 강변에 설치한 모습. 1712년 니콜라 드페르의 그림. 위키피디아
루이 14세는 국가를 고루 발전시키려면 물 관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앙리 4세와 재무총관 쉴리 공작이 꿈꾸던 ‘대서양에서 지중해까지 물길 잇기’ 사업을 실현했다. 이탈리아나 네덜란드의 선진기술을 배워 1666년부터 1681년까지 15년 동안 뱃길로 사용할 운하를 거의 250㎞나 건설했다. 강을 잇는 운하 건설사업에 비하면 베르사유궁의 1400개의 분수와 폭포 그리고 뱃놀이용 운하의 물을 공급하는 일은 간단했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궁에 정착한 뒤에도 3만5천명의 일꾼이 각종 공사에 매달렸다. 왕은 자기 처소가 있는 북쪽 날개 쪽에 1687년부터 왕실예배당을 착공해서 1710년에 완공했다. 이것이 그의 치세의 마지막 공사였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베르사유궁 안팎의 모습은 계속 바뀌었다. 더욱이 그는 1688년에 그랑 트리아농 별궁을 지었다. 그리고 1683년에 왕비 마리 테레즈가 사망한 뒤 비공식 부부로 지내던 마담 드 맹트농과 그곳을 자주 찾았다.
루이 15세는 궁전 내부 장식에 변화를 주었다. 그것은 구불구불한 선을 가진 조개무늬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로코코 양식이라 한다. 이 양식의 그림은 선명한 색보다는 연한 파스텔 색조를 사용해서 남녀의 사랑, 여성의 내밀한 모습을 즐겨 그렸다. 또 루이 15세는 애첩인 퐁파두르 부인을 위해서 그랑 트리아농 별궁 옆에 프티 트리아농을 지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가 선물로 준 프티 트리아농을 즐겨 찾았고, 극장과 정자, 사랑의 신전(Temple de l’Amour)은 물론 농가 체험을 할 수 있는 농장을 건설했다.
모두 2300개의 방이 있는 베르사유궁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시였고, 구체제 신분사회의 상징이었다. 왕은 지방 귀족에게 임대료를 받고 궁에 살게 했으며, 은급을 베풀어 귀족의 충성심을 끌어냈다. 3천명에서 최대 5천명의 왕실·왕족·귀족·종교인·군인·궁인들이 살았고, 하루에 최대 1만명이 드나들었다. 평민들도 평소에 단정한 차림이면 정원을 드나들고, 일요일에는 거울의 복도에서 기다리다가 왕과 왕비가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왕비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을 기획한 라모트 백작부인은 1784년 마리 앙투아네트가 지나갈 때 기절했지만 관심을 끌지 못했다. 라모트는 궁중사제장 로앙 추기경을 끌어들였다. 왕비의 환심에 굶주린 로앙은 라모트가 시키는 대로 한밤중에 궁전 아래 베누스 숲으로 가서 왕비 역을 맡은 마리 니콜 르게를 만나 장미꽃을 받고는 진짜 왕비를 만났다고 믿었고, 얼마 뒤 라모트가 전하는 왕비의 부탁을 받았다. 지급보증인이 되어 왕비 대신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구입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보석상 뵈메르는 루이 15세가 애첩 마담 뒤바리에게 사줄 것을 기대하고 빚을 얻어 160만 리브르(황금 464㎏ 가치)짜리 목걸이를 제작했다. 루이 15세가 죽은 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가져갔을 때 ‘프랑스에는 값진 목걸이보다 배 한 척이 더 필요’하다며 사지 않았다. 왕비는 이때 단 한번 목걸이를 보았다. 보석상은 10년 동안 애를 태우던 차에 로앙이 지급보증인으로 나서자 선뜻 물건을 내주었다. 라모트는 로앙이 가져다준 목걸이를 해체해서 영국으로 빼돌렸다. 보석상은 왕비에게 빚 독촉을 하고, 억울하게 사건에 얽힌 왕비는 왕에게 호소했다. 1785년 8월15일 로앙 추기경은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올리려고 거울의 복도를 지나다가 수많은 사람 앞에서 붙잡혔다. 로앙 추기경은 장미꽃 값(말 그대로 화대)을 거하게 지불했다.
정원 쪽에서 바라본 베르사유궁전의 전경. 건물 뒤쪽이 궁의 정문이다. 위키피디아
베르사유궁에서 가장 화려한 거울의 방. 방이라기보다는 벽을 유리로 만든 복도이며, 원이름 역시 ‘거울의 복도’이다. 위키피디아
베르사유궁전이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사례는 또 있다. 루이 15세는 1755년 1월 베르사유궁에서 병치레를 하는 8녀 빅투아르 공주(일명 5공주 Madame Cinquième 마담 생키엠)를 잠시 위로한 뒤 난방이 더 잘되는 그랑 트리아농궁으로 돌아가려고 오후 6시쯤 마차로 다가섰다. 그때 호위병들의 울타리를 뚫고 로베르프랑수아 다미앵이 불쑥 나타나 왕의 오른쪽 몸통을 칼로 찔렀다. 겨울옷 덕에 왕은 치명상을 입지 않았다. 철책을 지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쿠르 드 마르브르(흰색과 검은색 대리석으로 포장한 마당)에서 일어난 일이다. (다미앵 처형은
파리시청 편 참조)
루이 14세는 새 궁전에 흡족한 나머지 왕세자를 위해 ‘베르사유의 정원을 보러 다니는 방법’ 25개 항목을 썼다.
“쿠르 드 마르브르의 현관을 지나 밖으로 나서면 곧 테라스로 갈 수 있다. 거기서 잠시 멈춰 파르테르(화단)의 못과 분수를 본 뒤에 층계 쪽으로 가서 라토나 못을 보라.”
그는 남들도 자기처럼 베르사유궁과 정원에서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어주기를 바랐다. 라토나는 태양의 상징, 곧 자신인 아폴로, 그리고 달과 사냥의 신인 디아나를 낳은 신이다. 파르테르는 중앙·남·북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대지 한가운데서 보면 장방형의 네 귀퉁이를 잘라 팔각형으로 만든 못이 두 개 있다. 고대 신화와 프랑스 8대 강을 형상화해서 배치한 못은 웅장한 궁전과 바깥세상을 거꾸로 비추는 물의 거울이다. 두 못 사이로 가면 층계 아래 라토나 못과 분수가 있다. 루이는 라토나 못의 뒤편에서 아폴로가 트리톤의 무리를 앞세우고 마차를 모는 광경을 보며 흡족해했다.
루이 14세를 따라 왕의 산책로에 있는 봄(꽃의 신 플로라)·여름(풍요의 신 케레스)·가을(술의 신 바쿠스)·겨울(갈등과 타락의 신 사투르누스)의 사계절 분수로 간다. 넓은 숲 사이를 거닐다가 동굴·분수·무도장·주악당을 만난다. 현대의 여행자가 숲에 널린 신화를 일일이 찾기란 어렵다. 옛사람들처럼 운하에 배를 띄우고 연극을 감상하거나 불꽃놀이를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나는 넵투누스 못에 가까운 풀밭에 앉아서 여름밤 하늘을 환하고 아름답게 밝히는 불꽃놀이와 함께 음악을 연주하고 시나 연극을 낭독하는 ‘소리와 빛’(Son et Lumière 송 에 뤼미에르)의 잔치를 잊지 못한다.
궁전 안에서도 신화를 만난다. 루이 14세 시대에 생겼지만, 루이 15세 시대에 더욱 화려하게 꾸민 헤르쿨레스 살롱, 저녁에 간식거리를 제공하던 풍요의 살롱, 사랑의 신이자 금성의 상징인 베누스 살롱, 달·사냥의 신이며 아폴로의 누이인 디아나 살롱, 전쟁의 신 마르스 살롱, 목축·상업과 사자(使者)의 신 메르쿠리우스 살롱, 태양의 신 아폴로 살롱은 저마다 걸맞은 그림과 장식을 갖추었다. 루이 14세의 옥좌를 설치했던 아폴로 살롱에는 1701년에 리고가 그린 루이 14세의 초상화 사본이 걸려 있고, 원본은 루브르에 있다. 그림에서 루이 14세의 미끈한 다리를 보면서 그가 실제로 회저병으로 죽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다.
베르사유 정원에 있는 라토나 분수. 멀리 뒤쪽으로 베르사유 대운하가 보이며, 운하 좌우로는 베르사유 숲이 펼쳐져 있다. 위키피디아
1648년부터 파리고등법원 인사들이 왕권에 도전한 결과 루이 14세는 베르사유궁을 지었다. 법관동일체를 주장하는 그들은 1771년 루이 15세의 대법관
모푸의 고등법원 개혁(법복귀족들에 대한 세습 특권과 면세 특권을 대대적으로 손질하는 내용)에 반발하고, 1787~88년에 세제를 개혁할 때도 관습헌법인 ‘왕국의 기본법’을 앞세워 전국신분회의 동의를 받으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그들은 특권을 악착같이 지키려다 본의 아니게 혁명의 물꼬를 텄다. 전국신분회가 열리자, 특권을 하나도 누리지 못한 제3신분이 민주주의 혁명을 주도해서 국회를 구성했다. 특히 하층민 여성들이 왕을 베르사유궁에서 파리의 튈르리궁으로 데려갔고, 제헌의회는 1790년에 악착같이 저항하던 고등법원을 폐지했다.
프랑스 혁명기의 민주화 세력이 적폐와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이 시대의 우리 법조인이 마담 조프랭
(Marie-Thérèse Geoffrin)의 살롱(디드로, 볼테르 등 18세기 지식인들이 즐겨 찾았던 곳)에 나타났다면 어땠을까. 이들이 계몽사상가들의 대화에 끼지 못한 채 마담에게 육체적 대화 상대를 요구하다 룸살롱에나 가보라는 말을 듣고 쫓겨났다는 참담한 소식을 듣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당시에도 대중을 위해 애쓰는 수기신문 기자가 많았으니 그런 풍성한 소식을 막을 길이 없을 것 같다. 심지어 어떤 검사는 디드로의 미술평론 <살롱>을 읽다가 룸살롱 얘기가 아니라는 데 화가 나서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글을 쓸 수 없으니 표절이다’라는 구실로 디드로와 함께 백과사전 <앙시클로페디>에 기고한 150여명의 집을 무차별 수색하고, 판사 앞에서 표절 방법을 시연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다가 기분만 상했다.
(‘주명철의 프랑스 역사산책’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