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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가장 오래된 ‘새 다리’ 퐁 뇌프, 근대 다리의 모델 되다

등록 2020-11-28 09:09수정 2020-11-28 10:10

[토요판] 주명철의 프랑스 역사산책
(22) 퐁 뇌프

중세 다리는 건축비 충당하려
다리 위에 상가건물 지어 분양
시장통처럼 복잡하고 답답해

1604년에 완공된 퐁 뇌프는
왕과 파리시가 비용 감당해
넓고 쾌적한 최초의 다리
처음으로 보도도 따로 설치
1604년 앙리 4세 때 완공된,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 퐁 뇌프(새 다리)의 전경. 당시 주상복합형 상가들로 꽉 찬 다른 다리들과 달리 교각 위에는 건물들이 없이 시원하게 만들어졌으며, 사람이 다니는 인도도 최초로 설치됐다. 위키피디아
1604년 앙리 4세 때 완공된,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 퐁 뇌프(새 다리)의 전경. 당시 주상복합형 상가들로 꽉 찬 다른 다리들과 달리 교각 위에는 건물들이 없이 시원하게 만들어졌으며, 사람이 다니는 인도도 최초로 설치됐다. 위키피디아

“퐁 뇌프는 사람의 심장처럼 활동과 순환의 중심이다.”

다리가 생긴 지 170여년 뒤에 메르시에가 말했듯이 19세기까지는 오늘날의 에펠탑만큼 중요한 이정표였다. 콜로라도 계곡(작품명 Valley Curtain), 뉴욕 센트럴 파크(The Gates), 플로리다 비스케인만(Surrounded Islands), 베를린 의사당(Wrapped Reichstag) 같은 대규모 설치작업을 한 환경예술가 크리스토와 잔클로드가 퐁 뇌프를 작품 소재로 택한 이유를 생각해본다.

1985년 9월 어느 날 퐁 뇌프를 지나는 길에 교각에서 뭔가 이상한 작업을 하는 것을 보았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살던 시절이라서 도서관이 쉬는 날에 마음먹고 작업 현장을 찾았다. 산악인과 잠수부가 밧줄을 걸고 교각에 천을 두르고 있는데, 간단한 셔츠와 청바지 차림에 안전모를 쓴 호리호리한 사내와 어떤 여성을 먼발치에서 보고 홀린 듯이 강변까지 뒤따랐다.

나중에 그가 환경예술가 크리스토(Christo Vladimirov Javacheff)였음을 알았고, 그 곁의 여성이 부인인 잔클로드(Jeanne-Claude Denat de Guillebon)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크리스토와 잔클로드는 각각 불가리아와 모로코에서 같은 날(1935년 6월13일)에 태어나 1950년대에 프랑스 파리에서 결혼했으며, 잔클로드는 남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그들은 ‘크리스토와 잔클로드’로 함께 활동했다. 이처럼 우연히 ‘퐁 뇌프 포장’(The Pont Neuf Wrapped)의 설치 과정과 작가 부부를 직접 본 일은 아직도 행복한 추억거리다.

크리스토의 1985년 ‘퐁 뇌프 포장’

1981년에 크리스토는 퐁 뇌프를 포장하려는 계획을 발표했다. 1982년에 파리시장 자크 시라크는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일화를 소개하면, 시라크는 1984년에 보좌관이 내민 서류에 무심코 서명했는데 그 속에 허가서가 들어 있었다. 시라크가 뒤늦게 승인을 취소하려 했지만, 잔클로드는 이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압박해서 결국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환경예술가인 크리스토와 부인인 잔클로드는 1985년 2주 동안 퐁 뇌프 다리 전체를 천으로 감싼 작품을 선보였다. 작품 전시 당시 천으로 싸인 퐁 뇌프의 야경 모습. 위키피디아
환경예술가인 크리스토와 부인인 잔클로드는 1985년 2주 동안 퐁 뇌프 다리 전체를 천으로 감싼 작품을 선보였다. 작품 전시 당시 천으로 싸인 퐁 뇌프의 야경 모습. 위키피디아

‘퐁 뇌프 포장’의 허가 조건은 세가지였다. 파리시는 재정 지원을 하지 않는다. 작업 중 다리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작업 중 통행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거의 한달 동안 누런색 천(4만1800㎡)과 끈(13㎞)으로 다리의 모든 부분, 가로등까지 꼼꼼히 포장했다. 내 기억으로 독일에서 천을 짰다고 들었다. 9월22일~10월6일의 전시 동안 포장한 다리와 주변의 풍광이 시시각각 바뀌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강물이 교각을 덮은 천에 스미고, 밤에는 금빛 조명이 비출 때 그 다리 곁을 오가는 유람선(바토무슈)의 모습도 아름다웠다. 2주의 전시가 끝나고 퐁 뇌프는 옛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남은 것은 도록·엽서·사진이다.

환경예술가 또는 대지예술가인 크리스토가 장기적인 계획과 설치 과정에 비해 짧은 기간에 전시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전시 허가가 가장 큰 문제였을 테지만, 그는 인간사의 덧없음을 깨우쳐주는 것으로 만족했을지 모른다. 더욱이 그는 ‘퐁 뇌프 포장’을 통해서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재설정했다. 그는 부드러운 천으로 포장한 퐁 뇌프와 그 위·아래·주변을 오가는 사람과 운송 수단이 서로 만나고 스쳐가는 우연성, 그들이 내는 소리까지 작품의 일부로 동원했고, 거기 참여한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순간을 만들어주었다.

퐁 뇌프 이전에도 ‘새 다리’(퐁 뇌프)가 있었다. 14세기까지는 남쪽에서 프티 퐁과 북쪽에서 그랑 퐁(나중에 ‘퐁토샹주’로 개칭)을 놓고 시테섬을 지나다녔다. 샤를 5세가 파리장관에 임명한 오브리오는 1378년부터 1387년까지 노름꾼·부랑자·노상강도를 강제동원해서 시테섬과 좌안을 연결하는 돌다리를 새로 놓았고, 프티 퐁 뇌프 또는 간단히 퐁 뇌프라 불렀다. 이 새 다리는 1408년 1월 유빙에 부딪쳐 무너졌기 때문에 1416년에 나무다리를 놓았고, 1424년에 시테궁에 있던 생미셸 예배당 이름을 따서 생미셸 다리라고 불렀다. 그 뒤 이 다리는 홍수 등으로 무너져 몇차례 새로 만들어졌는데, 현재의 것은 1857년에 건설된 것이다.

현재의 퐁 뇌프는 생미셸 다리가 된 퐁 뇌프보다 당연히 늦게 생겼다. 원래 시테섬의 서쪽에 작은 섬 두개가 있었다. 그중 일 오 쥐프(Ile aux Juifs, 유대인들의 섬)는 14세기 초에 탕플기사단장 자크 드 몰레를 화형시킨 곳(탕플 길 참조)이라서 ‘탕플기사들의 섬’이라 부르기도 했다. 또 하나는 소를 풀어놓고 풀을 먹이던 일 뒤 파스퇴르 오 바슈(Ile du Pasteur-aux-Vaches)였다. 이 두 섬과 시테섬 사이를 매립하면서 퐁 뇌프 건설 공사를 시작했다. 앙리 3세 치세에 건축가 자크 2세 앙드루에 뒤 세르소의 설계로 1578년에 첫 돌을 놓았고, 결국 앙리 4세 치세인 1604년에 기욤 마르샹이 완공했다.

‘탕플기사들의 섬’을 깔고 생긴 광장을 처음에는 ‘퐁 뇌프 광장’으로 부르다가 1614년에 앙리 4세 기마상을 세운 뒤 앙리 4세 광장이라 불렀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2세는 1610년에 앙리 4세가 살해당하고 과부가 된 사촌 누이 마리 드 메디시스를 위해 앙리 4세의 기마상을 보내주었다.

스위스의 지도 제작자인 마테우스 메리안이 1615년에 판화로 만든 파리 지도(메리안 지도). 밑줄 친 부분이 불과 몇년 전에 만든 퐁 뇌프 다리. 다리 뒤쪽 시테섬에 노트르담 대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스위스의 지도 제작자인 마테우스 메리안이 1615년에 판화로 만든 파리 지도(메리안 지도). 밑줄 친 부분이 불과 몇년 전에 만든 퐁 뇌프 다리. 다리 뒤쪽 시테섬에 노트르담 대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퐁 뇌프 다리 중간에 있는 앙리 4세의 기마상. 애초 1614년에 만들어졌으나, 혁명기인 1792년 무기를 만들기 위해 용광로에 들어간 뒤 1818년에 다시 제작됐다. 위키피디아
퐁 뇌프 다리 중간에 있는 앙리 4세의 기마상. 애초 1614년에 만들어졌으나, 혁명기인 1792년 무기를 만들기 위해 용광로에 들어간 뒤 1818년에 다시 제작됐다. 위키피디아

용광로에 들어간 앙리 4세 기마상

앙리 4세 기마상이 세워진 뒤 얼마 지나지 않은 1639년 그의 아들인 루이 13세의 기마상이 보주광장에 세워졌을 때, 사람들은 아버지 앙리 4세의 인물이 아들 루이 13세의 인물보다 낫지만, 아들의 말이 아버지 말보다 더 아름답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루이 13세의 말은 앙리 4세의 말보다 반세기 앞서 제작되었다. 1559년에 과부가 된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1560년에 남편인 앙리 2세의 기마상을 미켈란젤로에게 주문했다가 나이 때문에 제작할 수 없다고 거절당했다. 왕비는 다니엘레 다 볼테라에게 의뢰했다. 다니엘레는 말부터 제작하고 인물상 작업을 진행하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 조각가 피에르 2세 비아르는 그 뒤 루이 13세의 인물상을 제작하면서 다니엘레가 제작했던 말(앙리 2세를 위한)에 앉혔다.

우리는 앙리 4세의 말과 반세기 앞서 제작한 루이 13세의 말의 아름다움을 비교할 길이 없다. 프랑스 혁명기 대외전쟁에 쓸 대포를 만들 때 왕들의 기마상이나 교회의 종을 용광로에 넣었기 때문이다. 무기를 보습으로 만들기보다 보습을 무기로 만들기가 더 쉬운 법이다. 혁명은 모든 관계를 새로 설정하는 격변이긴 해도, 왕 대신 전쟁을 선택하기보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성취하는 목적을 설정해야 옳다. 19세기에 앙리 4세의 청동상과 루이 13세의 대리석상을 세운 목적이 무엇이건, 오늘날에도 왕정시대의 유산을 보전하는 이유는 그때로 돌아가자는 뜻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의 유산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원래 앙리 4세 기마상을 1614년에 퐁 뇌프에 세웠지만, 기단까지 설치하는 공사는 조각가 뒤프레가 1635년에 끝냈다. 기마상은 퐁 뇌프의 가운데 서쪽 끝에서 동쪽을 바라본다. 퐁 뇌프의 길이와 너비에 대해 존스(C. Jones, 2004)는 278m에 28m를 제시할 때, <파리 역사사전>(1825)은 170투아즈(약 340m)에 13투아즈(약 26m)를 제시할 만큼 자료마다 큰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퐁 뇌프는 아주 길고 넓은 다리임이 분명하다. 벨기에 태생의 프랑스 언론인 바뇌나케르의 말대로 “다리는 인류를 잇는 붙임표다”. 과연, 퐁 뇌프는 파리 주민과 외지인이 몰려드는 명소가 되었다. 약속도 없이 누구를 만나고 싶을 때 퐁 뇌프로 가서 기다리면 만날 수 있다고 할 정도였으니, 치안담당관들은 다리를 감시하고 범법행위를 예방하고 범인을 잡았다. 그래도 소매치기는 그 나름의 규칙을 지키면서 부지런히 활동했다. 조직마다 다른 표시를 달고, 타 조직원이 먼저 노린 제물을 가로채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경찰의 정보원 노릇을 하면서 몇푼씩 받거나 현행범으로 체포당하는 일을 피했다. 공권력과 범법자가 서로 이익을 주면서 공생하는 관계를 어떤 사회가 뿌리 뽑을 수 있겠는가?

인상주의 화가 중 대표적인 작가인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그린 퐁 뇌프 다리. 오른쪽 멀리 앙리 4세 기마상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인상주의 화가 중 대표적인 작가인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그린 퐁 뇌프 다리. 오른쪽 멀리 앙리 4세 기마상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센강의 물을 끌어올려 루브르궁 등에 공급하는 장치인 펌프장인 사마르텐의 모습. 17세기 작가인 장 쇼푸리에의 작품. 위키미디어
센강의 물을 끌어올려 루브르궁 등에 공급하는 장치인 펌프장인 사마르텐의 모습. 17세기 작가인 장 쇼푸리에의 작품. 위키미디어

앙리 4세 기마상 아래서 메달 장사꾼이 값을 묻는 손님에게 대답한다. “앞에 건 앙리 4세 메달은 6프랑이요.” 등 뒤에 건 루이 14세 메달을 가리키니, 장사꾼이 시큰둥하게 말한다. “그것은 따로 팔지 않고, 앙리 4세를 사면 덤으로 주겠소.” 앙리 4세는 쉴리 공작을 재무총관으로 임명하고 종교전쟁으로 파탄 난 재정을 안정시켰는데, 손자인 루이 14세는 정복전쟁으로 재정을 망쳤다는 점에서 할아버지의 인기를 따를 수 없었다. 실제로 혁명기에도 사람들은 앙리 4세의 기마상을 보호해주다가 결국 1792년에 용광로에 집어넣었다.

1607년의 펌프장 ‘사마리텐’

퐁 뇌프 이전의 다리를 건설할 때는 주상복합의 건물을 분양해서 자금을 마련했기 때문에 다리는 다닥다닥한 건물을 이고 있었다. 그러나 퐁 뇌프는 왕과 파리시가 비용을 함께 마련해서 시원하게 지었다. 넓고 시야가 탁 트인 근대식 다리의 효시가 됐다. 또 이 다리는 마차가 다니는 중앙 길 양옆에 사람이 다니는 보도를 처음으로 설치했다. 보도와 다리 난간에는 장사꾼들이 온갖 식료품과 장신구를 늘어놓고 팔았다. 다리 중간쯤에는 황금색 레몬을 무더기로 쌓아놓은 가게에서 상큼한 냄새가 강풍에 실려 퍼졌다. 행상인이 개양귀비꽃을 팔거나, ‘불순한’ 출판물을 외투 속이나 치마 밑에 감추고 다녔다. 개털을 다듬는 미용사와 충치를 뽑는 의사, 노래 장사꾼도 한자리씩 차지했다. 징집관들은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는 젊은이를 유혹해서 8년간의 군복무 계약에 묶으러 다녔다.

퐁 뇌프는 종교축일이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루브르궁-시테섬의 노트르담 대성당-파리시청을 지나는 종교행렬이 거치는 장소였고, 왕세자의 출산이나 결혼식을 축하하는 불꽃놀이가 벌어질 때, 구경꾼들에게 가장 좋은 자리를 제공했다.

1607년에 앙리 4세는 퐁 뇌프 북쪽에 사마리텐을 지어 루브르궁에서 쓰는 물을 공급했다. 이 펌프장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에게 물을 주는 상을 설치했다. 1712년에 이 시설을 재건축하고 몇번 고쳐 쓰다가 1813년에 헐어버렸다. 1870년에 에르네스트 코냐크는 퐁 뇌프 북쪽 길 건너에 사마리텐백화점을 세웠다. 애칭 ‘라 사마르’(La Samar)는 “없는 것이 없는 백화점”을 자랑했고, 영화 <본 아이덴티티>(2002)에 나온 뒤 2005년부터 새 단장을 시작해서 올봄에 다시 문을 열었다.

퐁 뇌프를 무대로 연인들의 사랑을 그린 영화 &lt;퐁 뇌프의 연인들&gt;(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한 장면. &lt;한겨레&gt; 자료사진
퐁 뇌프를 무대로 연인들의 사랑을 그린 영화 <퐁 뇌프의 연인들>(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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