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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왕과 귀족 간 편싸움 희생양 된 ‘오를레앙의 성녀’

등록 2020-08-29 09:44수정 2020-08-29 11:11

[토요판] 주명철의 프랑스 역사산책
(16) 피라미드 광장의 잔 다르크 동상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은
왕위계승과 지배권 둘러싼
두 왕실과 귀족 간의 패싸움

로렌지방 농부 딸 잔 다르크
쫓기던 프랑스 샤를 7세 도와
오를레앙 회복 등 공 세웠으나
내부 배신에 영국군에 처형돼
그가 다친 위치에 동상 세워
프랑스 화가 장 피쇼르가 1504년에 그린 말을 탄 잔 다르크. 위키미디어
프랑스 화가 장 피쇼르가 1504년에 그린 말을 탄 잔 다르크. 위키미디어

‘피라미드 광장’은 루브르궁과 튈르리(튀일리) 공원 사이에 있는 작은 광장인데, 거기 금빛 찬란한 잔 다르크 동상이 서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잔 다르크는 어떤 인연으로 거기 있는 것일까?

바스티유 광장에서 생탕투안 길을 따라가다 생폴 교회(église Saint-Paul-Saint-Louis)를 지나면서 리볼리 길을 만난다. 리볼리 길은 3㎞ 정도 서쪽으로 곧게 뻗어 258번지에서 콩코르드 광장과 닿는다. 리볼리 길의 192번지는 피라미드 광장과 연결되었다. 1802년에 그곳에 있던 왕실 마구간을 헐고 리볼리 광장을 조성했다.

혁명기에 제헌의회가 베르사유에서 왕을 따라 파리에 정착했을 때 의사당으로 쓰던 건물은 왕실 마구간의 일부인 승마연습장이었고, 리볼리 길 230번지 일대였다. 그곳에서 1792년 8월10일에 ‘제2의 혁명’을 겪고 공화체제를 수립한 뒤 루이 16세를 재판했다. 19세기 초부터 그 일대를 정비하고 동서축을 시원하게 뚫으면서 나폴레옹이 1797년 1월에 오스트리아에 대승을 거둔 리볼리 전투를 기리는 뜻으로 리볼리 길이라 불렀다.

프랑스 파리의 피라미드 광장은 19세기 초 리볼리 광장이었으나 1932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리볼리는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와 싸워 이긴 전쟁터이며, 피라미드 역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승리를 기념한 이름이다. 광장 중앙에 서 있는 황금색의 잔 다르크 동상 오른쪽에 유서 깊은 레지나 호텔이 있다. 위키피디아
프랑스 파리의 피라미드 광장은 19세기 초 리볼리 광장이었으나 1932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리볼리는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와 싸워 이긴 전쟁터이며, 피라미드 역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승리를 기념한 이름이다. 광장 중앙에 서 있는 황금색의 잔 다르크 동상 오른쪽에 유서 깊은 레지나 호텔이 있다. 위키피디아

15세기 초 귀족 공포정 내쫓은 파리시민

1429년 잔 다르크는 파리에서 영국군과 부르고뉴군을 몰아내려고 샤를 5세의 성벽을 공격하다가 리볼리 광장 근처에서 다쳤다. 1874년에 조각가 에마뉘엘 프레미에가 제작한 잔 다르크 상을 세워 그 사실을 기념했다. 또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932년에 광장의 이름을 피라미드 광장으로 바꿨다.

1900년에 문을 연 뒤 수많은 영화에 출연한 레지나 호텔이 광장 옆에 있다. 나는 1977년에 제작한 <깊은 밤 깊은 곳에>(The Other Side of Midnight)라는 영화에서 그 호텔을 처음 보았다. 2002년의 <본 아이덴티티>는 파리의 뒷골목과 레지나 호텔 내부를 보여주었다. 이병헌이 생로크 교회 근처, 옛날 자코뱅 수도원이 있던 골목에서 존 말코비치와 브루스 윌리스에게 기관총을 난사하는 <레드 2>(2013년 작)에도 나왔다.

매년 ‘투르 드 프랑스’의 결승점을 향해 전날까지 선두인 ‘노란 옷’(maillot jaune) 입은 선수를 이기려는 사이클 선수들이 남쪽의 지하차도에서 피라미드 광장으로 진입하고 전력 질주해서 콩코르드 광장 쪽으로 사라진다. 레지나 호텔 맞은편 피라미드 길 3번지에 있는 선배의 집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그 시합을 보면서, 멀리 이탈리아 시에나 캄포 광장의 레스토랑 발코니에서 팔리오 경기(시에나에서 일년에 두번씩 열리는 유서 깊은 경마 경기)를 보는 부자들의 기분을 조금 느꼈다. 올해는 8월29일에 니스를 출발한 선수들이 9월20일에 피라미드 광장을 지나 결승점인 샹젤리제를 향해 질주할 것이다.

이제부터 백년전쟁의 후반기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 위그 카페의 직계손이 끊어지고 발루아 가문이 왕위를 잇는 시점으로 돌아가자. ‘미남왕’ 필리프 4세의 맏아들인 ‘고집불통’ 루이 10세가 1314년에 즉위했지만 1316년에 죽었다. 부르고뉴 공작 외드는 루이의 맏딸 잔이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이의 둘째 왕비가 낳은 ‘유복자’ 장 1세도 얼마 뒤에 죽었다. 귀족들이 루이 10세의 동생(필리프 5세)을 강력히 추천해서, 프랑스에 여왕이 생기는 길을 막았다. 그것이 ‘왕위는 여성에게, 또는 여성을 통해서 계승하지 않는다’는 살리카법을 적용한 첫 사례다. 필리프 5세를 이은 그의 동생인 샤를 4세도 일찍 죽어 카페 왕조의 남성 직계가 끊기자,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또다시 논란이 일었다. 결국 필리프 4세의 동생인 샤를 드 발루아의 장남(샤를 4세의 사촌)인 발루아 백작이 필리프 6세로 왕위를 이었다. 카페 왕조가 끝나고 발루아 왕조가 시작됐다.

그러나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어머니 이자벨 드 프랑스가 샤를 4세의 누이이기 때문에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보다 자신이 먼저 프랑스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이처럼 발발한 백년전쟁은 영국 왕이 왕위계승법과 영지에 대한 권리에 불만을 품고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프랑스가 고전하다가 ‘현명왕’ 샤를 5세가 겨우 전세를 바꿔놓았다. 그의 아들 ‘미친 왕’ 샤를 6세 치세인 1414년에 랭커스터 가문의 영국 왕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공주 카트린과 결혼하고 프랑스 왕위를 잇겠다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프랑스를 침공했다. 1415년 10월 영국의 궁수부대는 파리 북쪽 240㎞에 있는 아쟁쿠르에서 프랑스 봉건귀족의 기병대를 궤멸시키고 노르망디 지방을 차지했다.

샤를 6세와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는 모두 12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열째 카트린 공주와 두살 터울인 열한째 샤를 왕자만 살아남았다. 샤를은 1403년에 파리 생폴 저택에서 아들 중 다섯째로 태어났기 때문에 왕위와 거리가 멀었지만, 1417년에 넷째 형이 죽자 왕세자가 되었다. 왕세자 샤를의 지지자인 아르마냐크 백작이 공포정을 실시하자, 성난 파리 주민들은 1418년 5월28일과 29일 사이 밤에 들고일어나 백작과 그 추종자들을 죽이고 수천명을 쫓아냈다.

8월20일 밤에 망나니 카플뤼슈는 파리 하층민을 이끌고 바스티유 요새를 공격하고 아르마냐크 잔당을 공격했다. 파리 장관 뒤 샤텔은 왕세자를 깨웠다. 뒤 샤텔은 주군인 오를레앙 공 루이 1세가 1407년에 부르고뉴 공 장 1세에게 살해당한 뒤 샤를에게 발탁되었다. 샤를은 파리 남방 240㎞에 있는 영지 부르주로 가서 아르마냐크 군대를 이끌면서 영국군과 싸웠다.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데 니티스가 1876년에 그린 피라미드 광장의 모습.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데 니티스가 1876년에 그린 피라미드 광장의 모습. 위키피디아

영국 편에 선 부르고뉴 공작

파리는 왕세자와 아르마냐크 세력을 몰아낸 뒤 부르고뉴 공국의 지배를 받았다. 부르고뉴 공작 장 1세는 사촌형 ‘미친 왕’ 샤를 6세를 마음대로 조종했다. 그는 ‘겁 없는 사람 장’(Jean Sans Peur)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다.

1396년에 25살인 느베르 백작 장은 아버지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르 아르디(샤를 5세의 사촌동생)의 명령으로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를 도와주러 갔다. 그는 그해 9월에 불가리아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튀르크 군에 붙잡혀 20만 플로린(금 700톤)을 주고 풀려났지만 무모하리만큼 겁이 없었다. ‘겁 없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33살인 1404년에 아버지 뒤를 이어 공작이 되었다.

파리 지하철역(4호선 에티엔 마르셀) 북편에 부르고뉴 저택의 일부가 남아 있다. 필리프 2세 오귀스트 성벽에 기대어 1270년에 지은 ‘오텔 아르투아’를 1318년에 부르고뉴 공작이 소유하게 되었고, 1402년부터 부르고뉴 공작이 거주했다. 장 상 푀르 탑도 유명하다.

1419년 9월, 48살의 장 상 푀르는 16살의 조카인 왕세자 샤를과 협상하기로 하고 센강 상류의 몽트로 다리로 갔다가 살해당했다. 장의 아들인 필리프 르 봉은 영국과 힘을 합쳤다. 헨리 5세는 아쟁쿠르 승리 뒤에 프랑스 왕국의 영토를 잇달아 점령했다. ‘미친 왕’ 샤를 6세는 파리 동남방 175㎞의 트루아에서 영국과 부르고뉴 연합군에 붙잡혔다.

헨리 5세는 1420년 5월 샤를 6세를 강압해서 트루아 조약을 맺고 그의 사위가 되었다. 6월, 헨리 5세는 카트린 공주와 트루아의 생장 교회(église de Saint-Jean de Troyes)에서 결혼하고, 12월1일에 장인과 사위가 함께 파리에 입성했다. 2년 뒤인 1422년 8월에 헨리 5세는 뱅센성에서 36년의 생을 마감했다. 두달 뒤인 10월에 샤를 6세도 파리 생폴 저택에서 52살로 숨졌다. 헨리 5세의 왕비 카트린은 10개월의 젖먹이 아들을 영국과 프랑스의 왕 헨리 6세로 선포했다.

왕세자의 지위를 잃은 샤를과 추종자들은 헨리 6세를 프랑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왕세자 샤를을 샤를 7세로 모셨다. 화가 장 푸케가 1450년께에 그린 샤를 7세의 초상화(루브르 소장)에서 그의 옷차림이나 자세보다 얼굴에서 풍기는 우울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샤를은 장 상 푀르의 살해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미움을 사서 왕위계승권을 잃었는데, 그가 어머니의 불륜을 의심했기 때문에 불안하고 우울했다는 설도 있다.

피라미드 광장의 잔 다르크 동상. 백년전쟁 때 잔 다르크는 영국군이 점령한 파리를 회복하기 위해 싸우다가 이 근처의 성벽에서 부상을 당했다. 동상은 1874년에 조각가 에마뉘엘 프레미에가 제작했다. 위키피디아
피라미드 광장의 잔 다르크 동상. 백년전쟁 때 잔 다르크는 영국군이 점령한 파리를 회복하기 위해 싸우다가 이 근처의 성벽에서 부상을 당했다. 동상은 1874년에 조각가 에마뉘엘 프레미에가 제작했다. 위키피디아

잔 다르크를 버린 샤를 7세의 군대

샤를 7세는 부르주 일대의 서남 지방을 지배했기 때문에 1422년부터 ‘부르주 소왕국의 왕’이라는 별명으로 놀림감이 되었다. 그는 전쟁에 지친 나머지 기적만 고대하다가 1429년에 파리 남서쪽 300㎞에 있는 시농성에서 17살의 잔 다르크를 처음 만났다. 잔 다르크는 로렌 지방의 동레미 마을 농부의 딸로서, 독실한 어머니의 교육을 받고 3~4년 전쯤에 천사의 목소리를 들었다. “프랑스에서 영국군을 몰아내고, 샤를에게 유일한 왕이라는 정통성을 회복해주라.”

잔은 보쿨뢰르를 떠나 열흘 이상 거의 500㎞를 주로 밤에 이동해서 위험을 피하고 마지막에는 매복에 걸렸지만 기적적으로 살아서 2월23일에 시농성에 도착했다. 잔 다르크는 이틀 뒤에 한 무리의 기사들 틈에서 샤를 7세를 알아보았고, 그가 샤를 6세의 적자이며 정통성을 갖춘 왕이 분명하다고 안심시켰다. 왕은 잔을 100㎞ 남쪽의 푸아티에로 보내 신학자들의 검증을 받게 한 뒤, 4월5일에 궁에서 정식으로 받아들였다.

잔은 5월에 오를레앙을 구하고, 적군을 북쪽으로 몰아내면서 왕과 함께 랭스 대성당으로 가서 7월17일에 축성식·대관식을 거행했다. 성모의 생일인 9월8일에 그는 파리의 생토노레 문을 공략하다 다쳤다. 그때부터 그의 소명을 의심하는 사람이 늘었다. 그는 중요한 임무에서 배제된 채 겨울을 넘겼다.

1430년 5월에 잔은 파리 북쪽의 콩피에뉴가 부르고뉴군의 위협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달려갔다. 5월23일에 그가 봉쇄를 뚫고 콩피에뉴 성안으로 들어갔다가 곧바로 나가 싸우고 돌아가니 안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배신당한 그는 적군에게 붙잡혀서 종교재판을 받고 루앙에서 산 채로 화형당했다. 그를 마녀로 몰아야 영국군의 행위가 정당해졌다. 샤를 7세는 1436년에 파리를 탈환하고 ‘승리왕’(le Victorieux)이 되었다.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의 처녀’(Pucelle d’Orléans)가 되었고, 다르크(d’Arc)라는 귀족 이름은 죽은 뒤에 얻었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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