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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학술

프랑스 최고 집사가 왕 모신 잔칫날 목숨 버린 까닭은

등록 :2020-09-26 13:04수정 :2020-09-26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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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주명철의 프랑스 역사산책
(18) 샹티이성

푸케 이어 콩데 공 모신 바텔
집사장 거쳐 총지배인으로 활약

루이 14세 초청 샹티이성 잔치 중
주문한 생선 제때 배달 안 되자
주군 앞날 걱정해 극단적 선택

도시 인구 10%였던 집사와 하인
귀족 수행하느라 결혼도 못해
17세기의 유명한 집사장 바텔의 비극이 도사린 샹티이성의 모습. 파리 근교에 있는 샹티이성은 1560년께에 세워졌다. 위키피디아
17세기의 유명한 집사장 바텔의 비극이 도사린 샹티이성의 모습. 파리 근교에 있는 샹티이성은 1560년께에 세워졌다. 위키피디아

2000년 칸 영화제의 개막작은 롤랑 조페 감독의 <바텔>(Vatel)이었다. 파리의 북역에서 기차로 40분이면 닿는 샹티이성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 영화다. 프랑수아 바텔은 거물급 인사인 니콜라 푸케와 콩데 공을 차례로 모신 인물이다.

영화는 1671년 4월23일 목요일 오후부터 25일 토요일까지 콩데 공이 샹티이성으로 초대한 루이 14세와 일행 2천명을 위해 바텔이 침식·연회·볼거리·조명을 세심하게 준비하는 모습과 마지막 날 아침에 일어난 비극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연회에 참석했던 마담 드 세비녜가 딸 프랑수아즈(그리냥 백작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바텔의 최후를 알 수 있다.

“4월25일 4시부터 바텔은 홀로 성안을 돌아다니다가 생선장수를 만났다. 그가 생선 몇마리를 보고 전부냐고 묻자, 생선장수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낙심한 그는 자기 방으로 올라가 칼끝을 가슴에 대고 문으로 달려갔고, 그렇게 세번 만에 숨졌다. 얼마 뒤, 그가 주문했던 생선이 잇달아 도착했다. 그 소식을 전하러 간 하인들이 방문을 부수고 들어가니 바텔은 피를 흥건히 흘리고 죽어 있었다.”

샹티이성의 비극 등 절대군주정 시대 프랑스 상류사회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긴 마담 드 세비녜의 초상화. 17세기 화가 클로드 르페브르의 작품. 위키피디아
샹티이성의 비극 등 절대군주정 시대 프랑스 상류사회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긴 마담 드 세비녜의 초상화. 17세기 화가 클로드 르페브르의 작품. 위키피디아

1560년께에 샹티이성 완성

마담 드 세비녜는 17세기의 상류층 생활을 자세히 알려주는 서한집을 남겼다. 그는 외할아버지 필리프 1세가 1607년에 지은 파리 보주광장 1번지의 오텔 쿨랑주(Hôtel Coulanges)에서 1626년에 마리 드 라뷔탱샹탈로 태어났다. 그는 1644년에 앙리 드 세비녜와 결혼한 뒤 프랑부르주아 길 38번지의 오텔 드 쿨랑주(Hôtel de Coulanges)에서 세비녜 후작부인으로 살았다. 리옹의 부시장을 거쳐 프랑스 재무관이 된 스카롱이 짓고 1640년에 쿨랑주 가문에 넘어간 저택이다.

그가 살던 프랑부르주아 길에는 카르나발레 박물관 등 유서 깊은 건물이 있고, 비에유뒤탕플 길에 정문을 둔 바르베트 저택의 뒷문 쪽 골목과 연결된다. 바르베트 저택은 1300년에 파리 상인대표(시장)인 에티엔 바르베트가 지었으며, 왕실이 사들여 증개축했다. 뒷문 쪽 골목은 쇠뇌 사수의 골목(Ex-allée des Arbalétriers)이라는 이름으로 필리프 2세 오귀스트 성벽까지 연결되었다. 원래 궁수들이 쇠뇌 과녁을 놓고 사격 연습을 하던 공터였다가 골목으로 축소되었다.

1407년 11월에 ‘미친 왕’ 샤를 6세의 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가 바르베트 저택에서 열두째 아기를 사산했다. 그날 오를레앙 공 루이 1세는 사촌 형수인 왕비를 보러 갔다가, 곧바로 생폴 저택으로 오라는 왕의 명령을 받았다. 그는 수행원 두세명만 데리고 저택의 뒷문을 나와 골목길에서 부르고뉴 공 장 상 푀르의 부하들에게 팔과 손이 잘리고 머리가 깨져 뇌수를 사방에 뿌리면서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제 샹티이성으로 가보자. 1560년께에 최고 무관귀족인 안 드 몽모랑시 공작은 영지인 샹티이에 있던 집을 헐고 성을 지었다. 1632년에 앙리 2세 몽모랑시 공작이 사망한 뒤 부인의 조카인 앙기앵 공작이 호화로운 샹티이성을 물려받았다.

공중에서 본 샹티이성. 위키피디아
공중에서 본 샹티이성. 위키피디아

샹티이성의 도서관 모습. 위키피디아
샹티이성의 도서관 모습. 위키피디아

16살부터 군을 지휘하던 앙기앵 공작은 거물급 왕족이었고, 루이 13세의 총리대신 리슐리외 추기경의 조카사위였으며, 1646년 12월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콩데 공이 된다. 콩데 공은 ‘위대한 콩데’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뛰어난 장수였다.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그를 ‘타고난 군인’이라고 평했다. 정식 이름이 루이 2세 부르봉콩데인 그는 17세기 전반기 유럽을 갈가리 찢은 30년 전쟁(1618~1648) 시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관직도 세습한 문관귀족들

리슐리외 추기경은 반항하는 개신교도들의 도시를 직접 군사적으로 진압한 정치가로서, 루이 13세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프랑스를 국내외로 안전하게 만드는 일을 ‘국시’(國是, Raison d’Etat)로 삼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가톨릭 국가인 에스파냐와 개신교 국가들이 1618년에 시작한 국제전쟁이 점점 에스파냐에 유리해지자, 리슐리외는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가문을 중심으로 국제질서가 부활하면 프랑스가 안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635년 5월 개신교 국가들 편에서 개입했다.

1642년 12월 리슐리외 추기경이 사망했다. 그 틈을 타서 에스파냐는 프랑스를 공격했다. 1643년 5월 루이 13세도 세상을 떴다. 5살짜리 루이 14세가 왕위를 잇고 모후 안 도트리슈가 섭정이 되어 전쟁에 휩쓸린 나라를 이끌어야 했다. 에스파냐의 벨기에 지방 총독인 멜루는 보병 1만7천명, 기병 8천명의 막강한 플랑드르군으로 아르덴 지방의 로크루아(파리 동북쪽 240㎞) 요새를 공격했다.

1643년 5월 (아직은 콩데 공이 아닌) 22살의 앙기앵 공작은 보병 1만5천명, 기병 6천명으로 열세인 피카르디군에 루이 13세가 닷새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용기를 북돋워 로크루아 전투에서 이겼다. 앙기앵 공작은 그 뒤에도 승승장구하면서 16세기의 종교전쟁으로 피폐해진 프랑스에 30년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는 지위와 국제적 명성을 되찾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실제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바뀐 유럽의 지도를 보면 프랑스·네덜란드·스위스가 이득을, 에스파냐와 신성로마제국이 손해를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유럽 열강이 국제질서를 재편하는 사이, 국내 기득권 세력이 왕권 강화에 제동을 걸었다. 프랑스 왕국의 귀족은 원래 “싸우는 사람들”인 무관귀족뿐이었으나, 왕국이 통일되고 발달하면서 법관들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대다수 부르주아 계층인 법률가가 주요 관직(office)을 사들여 세습하면서 문관귀족이 되었다. 더욱이 1604년부터 ‘상속세’(paulette)를 내고 관직을 정식으로 물려주었다. 관직은 재산이었기 때문에 왕이 함부로 파면할 수 없었다. 가장 유력한 문관귀족인 파리고등법원의 법관들은 왕령의 효력을 발생시키는 등기권을 가졌고, 더욱이 왕령이 부당하다는 이유를 상주하는 권한(상주권)을 행사해서 왕권을 제한했다.

이것이 프롱드의 난의 배경이다. ‘프롱드’란 원심력을 이용해서 돌을 던지는 투석기나 새총을 뜻한다. 리슐리외 추기경의 뒤를 이어 왕권을 강화하려고 애쓰는 마자랭 추기경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사무실 유리창에 돌을 던졌기 때문에 ‘프롱드의 난’이라 한다. 더욱이 문관귀족들은 일부러 유치한 언어를 사용해서 마자랭을 놀리는 글인 ‘마자리나드’(mazarinades)를 마구 뿌리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혁명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뜻을 이룬 상황에서 무기를 거두고 사면받았다.

그러나 거물급 귀족들은 이탈리아 출신(마자랭)이 왕권을 강화한답시고 국정을 좌우하는 일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에 평민들과 힘을 합쳐 프롱드의 난을 이어나갔다. 콩데 공은 처음에는 마자랭 편을 들다가 나중에 왕족의 편에 가담했다. 마자랭은 1650년 1월 그를 체포하여 뱅센성에 가두었다. 루이 13세의 동생인 가스통 도를레앙이 왕족의 지도자로 나서서 저항했다. 콩데 공은 13개월 만에 석방된 뒤 보르도로 가서 에스파냐와 협상하고 군대를 지원받아 파리로 진격했다. 왕은 1651년 9월 성년이 되었지만, 모후와 마자랭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샹티이성의 주인이었던 콩데 공의 초상화. 쥐스트 데그몽의 작품. 위키피디아
샹티이성의 주인이었던 콩데 공의 초상화. 쥐스트 데그몽의 작품. 위키피디아

1653년 2월 마자랭이 파리에 입성하면서 난을 진압하고, 가스통 도를레앙을 블루아성으로 귀양 보냈다. 콩데 공은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1659년 11월 영토 문제와 루이 14세의 결혼 문제를 담은 피레네 조약을 맺은 덕에 비로소 프랑스 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콩데 공은 1671년 봄에 샹티이성에 루이 14세가 방문할 때까지 완전히 사면을 받지 못했다.

샹티이성은 1671년 4월23일 목요일 오후부터 이튿날 밤까지 화려한 잔치로 떠들썩했다. 보르비콩트에서 본 잔치 이래 1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담 드 세비녜의 편지를 보면 왕도 처음에는 25일 토요일에 방문할 계획이었다. 왕이 하루만 방문해도 최소 네끼를 차리고, 끊임없이 주전부리를 내놓고, 수많은 조명과 불꽃과 연극을 준비해야 할 텐데, 행사를 준비하는 바텔은 방문 일정과 손님의 수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애태웠다.

루이 14세의 갑작스러운 숙박 때문

1665년부터 샹티이성의 집사장(maître d’hôtel)이었다가 1667년부터 총지배인(contrôleur général)이 된 바텔은 왕이 2천명 이상을 데리고 2박3일을 머무른다는 사실을 보름 전에야 알았다. 그는 인근 농장과 먼 항구까지 사람들을 보내 식료품 재료를 구하고, 요리사와 하인과 허드렛일꾼을 새로 구했다. 그는 다양한 식단을 짜면서 요리사들과 빵·고기·생선·포도주·과일의 양을 계산했다. 시설이 부족했으므로, 이웃 마을에도 숙소와 마구간을 마련했다. 콩데 공이 모든 비용을 책임질 일이었지만, 왕의 신임을 받고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면 곧 빚을 갚을 수 있을 터였다.

18세기 샹티이성의 모습. 장바티스트 랄르망의 작품으로 콩데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18세기 샹티이성의 모습. 장바티스트 랄르망의 작품으로 콩데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그런데 생선 위주의 밥상을 준비하는 날 새벽이 왔음에도 싱싱한 생선이 겨우 몇마리만 도착했으니 지난 2주 동안 콩데 공을 위해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준비한 바텔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으리라. 그는 콩데 공의 완전한 사면과 신임을 되찾는 일을 그르쳤다는 자책감에 자살로 속죄했다.

도시 인구의 10%나 되는 집사·하인은 언제나 귀족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미혼자였다. 바텔도 미혼이었고 파리에서는 콩데 저택에서 지냈다. 6구의 콩데 길 9~15번지에 1764년까지 있었던 저택의 정원은 파리에서 제일 긴 보지라르 길과 닿는 곳까지였고, 왕족의 특권을 누리는 철책으로 경계를 표시했다. 또한 그는 굶주린 늑대가 나타나던 오솔길(sentier)을 뜻하는 상티에 길과 몽마르트르 길을 이어주는 생조제프 길(2구)에 아파트를 얻어서 개인 시간을 누리기도 했다.

문득 샹티이성의 실내에서 본 초상화들과 서재의 진귀본들, 그리고 눈 덮인 정원 끝에서 시냇물과 함께 얼어버린 물레방아가 생각난다. 화려한 연회를 묘사할 길이 없어 그저 영화 <바텔>을 권할 뿐이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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