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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일요일 아침 튈르리에서 프랑스혁명 불꽃이 튀었다

등록 2020-10-17 14:18수정 2020-10-17 14:25

[토요판] 주명철의 프랑스 역사산책
(19) 튈르리 공원

평민 편 재무총재 해임 항의하러
1789년 7월12일 일요일 아침에
콩코르드 광장에 모인 파리 시민
기병이 튈르리 정원까지 쫓아 학살
화난 시민들 무기 들어 혁명 시작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들로름에게
16세기 튈르리궁·정원 건축 착수케
혁명 때 궁궐 불탄 뒤 정원만 남아
파리 센강변을 따라 루브르 박물관에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뻗어 있는 튈르리 공원. 멀리 루브르 박물관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파리 센강변을 따라 루브르 박물관에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뻗어 있는 튈르리 공원. 멀리 루브르 박물관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중세 파리의 서민은 주로 짚이나 널빤지로 지붕을 덮었는데, 짚은 화재의 위험이 크기 때문에 점점 널빤지만 사용하게 되었다. 궁전이나 교회, 저택의 지붕에는 값비싼 점판암(청석돌) 기와를 사용했다. 중세 도시가 발달하면서 지붕 이는 일꾼은 권익을 지키기 위해 1327년부터 조합을 결성했다. 또 지붕의 물매가 가파르고 처마가 짧기 때문에 주요 건물의 처마 끝에는 납으로 만든 빗물받이와 홈통을 달아 벽을 보호했다. 빗물받이 장인들은 1546년에 지붕 이는 일꾼 조합에 가입할 수 있었다.

센강 좌안의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마을에서 기와를 굽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붉은 십자가 오거리’(생제르맹데프레 편 참조) 근처에 기와 가마가 있었다. 오거리에서 남쪽으로 뻗은 길은 1388년에 보지라르 길, 1510년에 튈르리 길, 1529년에 비에유튈르리 길, 1595년에 오늘날처럼 셰르슈미디 길(rue du Cherche-Midi)이 되었다. 튈르리(튀일리)는 기와 가마를 뜻한다. 도시가 더욱 번창하면서 강북의 ‘모래 채취장’인 사블로니에르(la Sablonnière)에도 1372년까지 가마가 세 군데나 생겼고, 그 뒤에 더욱 늘었다. 백년전쟁 시기에도 건축 경기가 살아 있었다는 뜻이다.

기와를 굽던 가마가 있던 자리

1260년께에 세운 캥즈뱅(Quinze-Vingts) 병원은 1779년에 지금의 자리인 바스티유 광장의 ‘오페라 바스티유’ 뒤편으로 옮길 때까지 사블로니에르 근처 필리프 2세 오귀스트 성벽의 생토노레 문밖에 있었다. 루이 9세(성 루이)가 눈먼 상이군인 300명을 보살피려고 지은 병원이다. 중세에는 포로의 눈을 칼로 찔러 시각장애인으로 만든 뒤에 풀어주는 사례가 많았다. 적에게 치명적 상해를 입혀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타격을 줄 수 있는 잔인한 방법이었다.

눈먼 군인에 대한 가장 악독한 사례를 남긴 사람은 비잔티움 제국의 바실리오스 2세였다. 그는 1014년에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불가리아 포로 1만4천명의 눈을 칼로 찌르고, 100명에 한명꼴로 눈 하나를 남겨주어 동료들을 이끌고 돌아가도록 했다. 모든 전쟁에서 승자의 권리는 자비를 베풀 때조차 잔인하다.

캥즈뱅 병원의 초창기 운영책임자인 재무담당관 피에르 데제사르(Pierre Desessarts)는 사블로니에르에 튈르리 저택(hôtel des Tuileries)을 짓고 살았다. 이렇게 기와 가마(튈르리)가 사블로니에르라는 지명을 대체했다. 16세기 초에는 재무관이며 청원심사관인 니콜라 2세 뇌빌 드 빌루아(Nicolas Ⅱ de Neuville de Villeroy)도 강쪽에 저택을 짓고 살았다. 투르넬 저택에서 지내던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이자 섭정인 앙굴렘 공작부인이 니콜라 2세의 저택으로 옮기고 건강을 되찾았고, 1518년에 저택을 사들였다. 1527년에 앙굴렘 공작부인은 왕세자궁의 집사장인 장 티에르슬랭이 쥘리 뒤 트로(Julie du Trot)와 결혼할 때 거기서 살도록 배려했다.

1559년 7월 앙리 2세가 투르넬 저택에서 숨진 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자녀들과 함께 루브르궁으로 옮겼다. 그는 튈르리 저택과 그 일대의 땅을 사들이고 1564년 5월부터 당대의 가장 유명한 건축가인 들로름(Philibert Delorme)에게 튈르리궁과 정원을 짓고, 울타리 바깥에 성벽과 보루를 세우게 했다.

스위스의 지도 제작자인 마테우스 메리안이 1615년에 판화로 만든 파리 지도(메리안 지도)의 일부. 앞쪽 튈르리 정원과 튈르리궁 뒤편에 루브르궁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스위스의 지도 제작자인 마테우스 메리안이 1615년에 판화로 만든 파리 지도(메리안 지도)의 일부. 앞쪽 튈르리 정원과 튈르리궁 뒤편에 루브르궁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리옹 출신인 들로름은 르네상스의 중심이 된 로마에서 3년 동안 미술과 건축을 공부하고, 1536년에 고향에 돌아와 생니지에 교회(Église de Saint-Nizier de Lyon)의 문을 제작하는 임무를 맡았다. 뒤벨레(Jean du Bellay) 추기경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파리로 불러 가서 앙리 2세에게 소개했다. 그렇게 왕의 건축가가 된 그는 튈르리궁의 초기 공사를 맡았다.

앙리 4세가 가톨릭교로 개종하고 파리에 들어갔을 때, 루브르궁과 튈르리궁은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앙리 4세는 두 궁을 하나로 연결하기로 결심하고, 두 궁 사이 460미터를 잇는 건물을 강변 쪽에 지었다. 튈르리궁은 들로름의 설계로 시작했지만 장 뷜랑(Jean Bullant)이 변화를 주었고, 앙리 4세 치세에 자크 2세 앙드루에 뒤 세르소(Jacques Ⅱ Androuet du Cerceau)의 설계를 바탕으로 증개축을 시작해서 루이 13세 치세에 완공했다. 그 뒤에도 왕들은 자기 취향대로 내부의 설계와 장식을 바꾸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튈르리궁의 공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강남에서 루브르궁으로 가는 방법은 두가지였다. 첫째, 생미셸 다리를 건너 시테궁 앞을 거쳐 그랑퐁(Grand-Pont, 큰 다리, 오늘날 퐁토샹주 Pont au Change)을 건너 복잡한 골목을 지나야 했다. 둘째, 호수 또는 다리가 멀리 떨어진 강변에서는 배를 이용했다. 1550년부터 바닥이 평평한 배(bac)를 타고 강남과 사블로니에르를 오갔다.

1564년부터 튈르리궁을 지을 때 이 배를 이용했다. 몽파르나스 채석장이나 보지라르 채석장에서 캔 석재를 노트르담데샹 길과 생플라시드 길, 뒤팽 길, 바크 길로 나루까지 옮긴 뒤 배에 싣고 강을 건넜다. 오늘날 우리는 17세기에 생긴 퐁루아얄(Pont-Royal) 다리와 남쪽으로 뻗은 뤼 뒤 바크를 걸으면서 튈르리궁의 석재를 옮기던 경로를 파악할 수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 친척이 지휘한 기병

튈르리궁의 정원은 르노트르(Le Nôtre) 가문의 손길을 거쳐 늘 아름다웠다. 더욱이 고대의 신화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조각상들이 나무 사이에 즐비하게 서 있었고 꽃밭과 분수와 연못도 정원을 거니는 즐거움을 보탰다. 오페라와 극장에 성매매를 노리는 여성이 단체로 드나들었다면, 일반에게 개방한 튈르리 정원에는 소속이 없는 여성이 돈주머니가 가벼운 난봉꾼에게 접근했다. 잔 베퀴(Jeanne Bécu)는 튈르리 정원에서 매매춘 세계에 첫발을 내디뎠고, 마침내 뒤바리 백작부인이 되어 만년의 루이 15세의 침대까지 올랐다.

튈르리 정원의 글과 그림, 사진, 동영상은 현장의 냄새를 전하지 못한다. 모든 곳에서 나는 냄새의 역사도 써볼 만하다. 6·25 전쟁에 참전한 미군이 비행기 안에서 부산 상공에 퍼진 인분냄새를 맡았다고 증언했지만, 오늘날 우리의 농촌에서는 축사의 냄새가 퍼지는 곳이 있을 뿐이다. 파리의 지하철에서 나는 냄새는 얼마나 충격적인가? 요즘 파리에 설치한 ‘거리소변기’(uritrottoir) 사진을 보면서, 옛날 나도 서울의 고속버스터미널 남성화장실에서 칸막이도 없는 소변기 앞에 남들과 나란히 서서 ‘유로키나제’의 원료를 배출할 때 맡던 냄새가 생각난다.

구체제(앙시앵레짐) 시기에 파리 골목길은 분뇨 냄새에 절었다. 염색업자는 가게 앞에 통을 놓고 소변을 모았고, 도살장이 있는 거리에서는 피 냄새와 함께 보도에도 피가 흘렀다. 18세기 극작가·문화비평가·국민공회의원이었던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가 튈르리 정원에 대해 쓴 글을 옮겨본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이어져 있는 파리의 튈르리 공원. 위키피디아
루브르 박물관에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이어져 있는 파리의 튈르리 공원. 위키피디아

“튈르리궁의 정원은 옛날부터 모든 사람의 약속 장소였다. 사람들이 주목(朱木)의 생울타리 아래 한줄로 앉아 용변을 보았다. 바깥에서 배설의 기쁨을 맛보는 사람이 많은 만큼 지독한 악취 때문에 튈르리 정원의 둔덕길을 지나다니기 어렵다.”

앙리 4세부터 19세기의 나폴레옹 1세와 나폴레옹 3세까지 역대 왕과 황제들이 튈르리궁에서 살았다. 루이 14세가 1682년 5월부터 베르사유궁을 정치적 중심지로 삼은 뒤에도 튈르리궁은 루이 15세의 어린 시절에 섭정이 정치를 하는 곳이었다. 절대군주정 시대의 신민은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없었는데, 1788년에 루이 16세가 전국신분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한 뒤 농민부터 도시민까지 일시에 정치화했다. 사람들이 쉽게 모이는 팔레루아얄 정원, 루이 15세 광장(오늘날의 콩코르드 광장), 튈르리 정원은 현대 프랑스를 탄생시킨 중심지가 되었다.

1789년 7월11일 저녁 베르사유에서 왕이 평민 편을 들어주던 재무총재 네케르를 편지 한통으로 해임했다는 소문이 12일 아침 파리에 퍼졌다. 마침 일요일이라 주민들은 아침부터 소문을 확인하고 울분을 토로할 수 있는 장소로 모여들었다. 팔레루아얄의 정원에는 정치적으로 좀 더 뚜렷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모였고, 튈르리궁의 정원에는 산책하는 사람이 많았다. 팔레루아얄에 모인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격한 발언을 쏟아내고 시위대로 돌변해 거리로 뛰쳐나가 10분 거리에 있는 튈르리 정원으로 가면서 사람들이 호응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척인 랑베스크 공이 용기병(용(dragon)을 부대 상징으로 하는 기병대)을 지휘하여 콩코르드 광장에 모인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튈르리 정원으로 도주하는 시위대를 공격했다. 단순히 정원을 거닐던 사람들도 무차별 공격을 당해 다치고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파리 주민들은 무기를 들고 이튿날 밤까지 입시세관(총괄징세청부업자들이 파리시에 들어오는 물건에 대한 소비세를 받던 곳) 울타리를 불태웠고, 14일에는 전제주의의 상징인 바스티유 요새를 공격하고 정복했다. 6월17일부터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평화적으로 진행하던 법적 혁명은 과격해졌고, 지방에서도 잇달아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10월6일에는 파리의 아낙들이 왕과 가족을 베르사유궁에서 튈르리궁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국민의회도 튈르리 정원의 마네주(승마연습장)를 국회의사당으로 개조하고 이주했다.

19세기 인상파 화가인 에두아르 마네가 튈르리 정원에서 열린 실외 음악회를 보러 온 관중을 그린 <튈르리 정원의 음악>(1862년). 위키피디아
19세기 인상파 화가인 에두아르 마네가 튈르리 정원에서 열린 실외 음악회를 보러 온 관중을 그린 <튈르리 정원의 음악>(1862년). 위키피디아

한때는 입헌군주제 실험 장소

튈르리궁과 정원은 입헌군주제를 실험하는 중심이 되었다. 루이 16세는 절대군주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1791년 6월20일부터 21일 사이 밤에 야반도주하여 국경 근처 바렌까지 갔다가 붙잡혔다. 그는 순순히 혁명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왕당파와 외세가 자신을 구해줄 날만 기다리다가 1792년 8월10일에 ‘제2의 혁명’을 맞이했다. 그날 그는 가족과 함께 궁을 떠나 국민의회(입법의회)로 도피한 뒤 폐위되었다.

1792년 9월21일부터 국민공회는 공화국 헌법을 제정하기 시작했고, 12월부터 루이 카페를 재판에 부쳤다. 1793년 1월 중순부터 의원들은 호명투표를 실시하여 1월21일에 루이를 처형했다. 5월10일부터 국민공회는 튈르리궁의 살 데 마신(Salle des Machines, 극장)에서 회의를 했다. 1795년 10월26일에 국민공회의 입법활동을 마칠 때까지 튈르리궁은 혁명의 중심지였다.

19세기에 제정을 거쳐 제3공화국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베르사유의 정부에 대항한 파리 코뮌의 투사들은 1871년 5월23일 튈르리궁에 불을 질러 파괴했다. 정부는 궁을 복원하지 않고, 튈르리 정원을 공원으로 남겨 파리의 숨통을 시원하게 터줄 동서축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렇게 다사다난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루브르궁과 튈르리 공원, 콩코르드 광장,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 라데팡스 개선문을 잇는 축이 곧게 뻗기 시작했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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