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이 지난해 10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미래 전기차 생태계’ 행사에서 제네시스 지(G)80 전동화 모델을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니켈 생산량 세계 1위인 인도네시아를 두고 국내 자동차·배터리 업계의 계산이 복잡해지고 있다. 국내 업체들은 배터리 필수 광물인 니켈의 원활한 수급을 위해 인도네시아와의 협력 및 현지 투자를 강화하고 있는데,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IRA)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나서다.
4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현대자동차는 지난달 25일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 대응을 위한 정부·업계 간담회에서 미국 전기차 보조금 지급을 위한 배터리 광물 원산지 조건에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에 참여하는 국가도 포함하는 방향으로 미국 정부와 협상해달라고 요청했다. 지난달 16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서명한 이 법은 미국 내에서 판매하는 전기차가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세 가지 조건을 명시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내년부터 리튬·코발트 등 주요 배터리 광물을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최소 40% 이상 조달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2027년에는 80%까지 규정이 강화된다.
현대차는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 참여국인 인도네시아를 염두에 두고 이런 요청을 한 것이다. 현대차는 그간 인도네시아 현지 시장 진출과 니켈의 원활한 조달을 위해 공을 들여왔다. 인도네시아는 인구 2억7천만명에 이르는 거대 시장이면서 니켈 매장량이 약 4900만톤(t)으로 세계 1위다. 니켈 생산량도 세계 1위로, 지난해 전 세계 생산량 가운데 37%를 차지했다. 현대차는 올해 3월 현지 공장을 준공해 전기차 아이오닉5를 생산하고 있다. 엘지(LG)에너지솔루션과 함께
배터리셀 공장 설립도 추진하고 있다.
문제는 인도네시아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나라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도네시아산 니켈을 쓴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는 미국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커졌다. 현대차로서는 기존 공급망 전략에 큰 변화를 줘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미국이 광물 원산지의 구체적인 조건을 연내 마련하겠다고 발표한 만큼 한국 정부가 인도네시아산 니켈을 쓴 전기차도 보조금을 받을 수 있도록 적극 협상해 달라는 요청이다.
한국무역협회 <핵심 원자재의 글로벌 공급망 분석 : 니켈> 보고서 갈무리
미국 정부와의 협상 결과에 따라 국내 기업이 주도하는 인도네시아 니켈 프로젝트에서 실리를 취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엘지에너지솔루션·엘지화학·포스코 등으로 구성된 엘지컨소시엄은 11조원 규모의 인도네시아 배터리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광산에서 채굴한 니켈을 이용해 제련·전구체·양극재·배터리셀 생산까지 완결형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사업으로, 현지 정부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인도네시아 정부와 협의해 미국 정부를 상대로 중재안을 제시해볼 수 있다. 니켈 채굴·제련 등 선공정은 인도네시아에 두되 전구체·양극재·배터리셀 생산 등 후공정을 한국에서 진행할 경우 한국산 배터리로 인정해달라는 아이디어다. 인도네시아는 주요 니켈 공급처를, 한국은 일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전략이다.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인도네시아가 전통적인 미국 우방은 아니지만 국내 배터리 3사와 일본 배터리사의 인도네시아 니켈 비중이 높기 때문에 협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법안 서명 뒤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한 배터리전문가는 “현지 공무원을 만났는데 미국 인플레 감축법을 시작으로 미국 중심의 전기차 공급망이 재편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컸다. 인도네시아는 자국 니켈을 활용해 외국 자본을 유치하면서도 글로벌 전기차 공급망에 편입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다만, 미국 정부가 한국 업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도 존재한다. 인도네시아의 주요 니켈 광산은 중국 자본의 손길이 닿아있다. 한국무역협회의
보고서를 보면, 전 세계 니켈 광산 프로젝트 대부분이 중국 자본에 의해 인도네시아에서 계획 중이거나 진행되고 있다. 전기차 공급망에서 중국을 제외하려는 미국 의도와 배치되는 상황이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 체결국인 오스트레일리아(호주)도 관건이다. 이 나라의 니켈 생산량은 세계 5위이지만, 채굴 가능 추정 매장량은 인도네시아와 같은 수준이어서 장기적으로 니켈 수급처의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다.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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