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쟁위원회의 프레데릭 제니 의장이 지난 4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 제공
“(지금 논의되는 빅테크 규제는) 한마디로 논리적이지 못합니다.”
최근 들어 전세계는 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둘러싼 각양각색의 논의로 들썩였다. 금산(금융-산업)분리를 본뜬
‘플산분리’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부터, 거대 플랫폼은 별도로 규율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법안이 나왔다. 이 중에 빅테크의 고삐를 적절히 죌 수 있는 해결책이 있을까. 지난 4일 서울국제경쟁포럼 참석차 방한한 프레데릭 제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쟁위원회 의장을 만나 의견을 들어봤다.
“유럽 DMA, 본질적 해결책 아냐”
프레데릭 제니는 28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 경쟁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다. 그의 이력에는 이밖에도 특이한 지점이 많다. 제니 의장은 프랑스에서 학부를 졸업한 뒤 미국 시카고대에서 학업을 이어갔으나, 반년 만에 하버드대로 옮겨 경제학 석·박사과정을 밟았다. 프랑스·영국 경쟁당국에서 각각 수년간 일한 경험이 있으며, 프랑스에서는 대법원 상사부 판사로도 근무했다.
최근의 빅테크 규제 흐름을 향한 그의 우려가 가볍게 들리지 않는 이유다. 그는 유럽의 디지털시장법(DMA)을 두고 “논리적이지 못하다”고 표현했다. 디지털시장법은 특정 플랫폼 기업을 ‘게이트키퍼’로 지정해 강도 높은 규제를 적용하는 내용이다. 게이트키퍼 지정의 핵심 기준은 기업 규모다. 시가총액이나 매출액이 특정 액수를 넘어야 한다. 검색엔진 등 법안에 열거된 8가지 ‘핵심 플랫폼 서비스’ 중 하나 이상을 제공하는 기업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있다. 주로 GAFAM(구글·애플·페이스북·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이 규제 대상이 될 것으로 예측된다.
제니 의장은 이런 설계가 필연적으로 구멍을 낳는다고 본다. “디지털시장법이 통과되면, 커넥티드 카에서 나오는 데이터는 어떻게 되죠?” 커넥티드 카가 보편화되면 사람의 이동 패턴에 대한 총체적인 데이터가 수집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무궁무진한
수익화가 가능해지는 셈이다.
“유럽에서는 이 데이터를 어디서 가져갈 것인지를 두고 엄청난 싸움이 있어요. 만약 자동차 제조사가 가져간다고 칩시다. 제조사는 그 데이터에 대한 게이트키퍼가 되는 거죠. 보험, 수리 등 다양한 영역에서 제조사가 그 데이터를 직접 이용해 기존 사업자들과 경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건 디지털시장법에서 규율하지 않아요.”
유럽 의회의 최근 논의는
게이트키퍼의 양적 기준을 상향 조정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제니 의장은 “할 일이 너무 많으니 일단 GAFAM에만 집중하겠다는 것”이라며 “하지만 핵심은 기업의 규모가 아닌, 이용자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는 ‘게이트키핑’ 능력의 여부”라고 했다.
빅테크 격전지 된 미국…“구조주의는 실수”
구조주의적 법안이 논의되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도 그는 우려를 드러냈다. 미국 하원 법사위원회는 지난 6월 일정 규모 이상의 플랫폼 기업이 이해충돌 사업을 소유·통제하지 못하도록 하는
‘플랫폼 독점 종식법’을 통과시켰다. 법안이 통과되면 아마존의 경우 자체 브랜드(PB) 소매업이나 물류 사업을 매각해야 할 수도 있다.
제니 의장은 먼저 미국의 변화는 당연한 결과라고 봤다. 그는 “유럽과 달리 미국은 오랫동안 ‘소비자 후생’에 대한 협의적인 해석에 의존해왔다”며 “그 때문에 최근에는 아예 법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 것”이라고 짚었다.
다만 구조주의적 해결책에 대해서는 부정적 평가를 내놨다. ‘네트워크 효과’라는 온라인 플랫폼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네트워크 효과란 어떤 플랫폼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플랫폼의 가치가 더 높아지는 특성을 가리킨다.
“우리가 아마존에서 물건을 사는 이유는 리뷰(후기) 때문이에요. 소비자들은 리뷰를 보고 어떤 제품이 반응이 좋은지, 왜 좋은지 더 잘 알 수 있죠. 이게 네트워크 효과를 만들어낸 겁니다. 리뷰를 올릴 수 있는 제품이나 사람의 범위를 제한한다면, 서비스 질이 떨어지겠죠.”
그는 미국이 거기까지 가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제니 의장은 “지금 미국 상황을 예측하는 건 점을 보는 것(reading tea leaves)과 같다”면서도 “구조주의적 해결책을 사용하는 수준까지 가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고 말했다.
“예측 어려워져…부처 협업 불가피”
적절한 해결책은 어디쯤에 있을까. 제니 의장은 “나에게도 마법 같은 해답은 없다”며 웃었다. “세상은 더욱 복잡해진 반면 경쟁당국이 파악할 수 있는 영역은 제한적”이란 설명이 따라붙었다. 그는 자신이 비상임위원으로 근무할 당시 영국 공정거래청이 페이스북의 인스타그램 인수를 승인했던 얘기를 꺼냈다. 본인에게 결정권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는 당시 결정을 반성한다고 했다.
“인스타그램은 그냥 사진 공유하는 앱인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랑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승인해준 거죠. 그 누구도 인스타그램이 지금과 같은 SNS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특히
빅테크 인수합병 문제를 규율하는 데 있어 경쟁당국이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했다. 제니 의장은 “어떤 스타트업이 구글이나 페이스북에 인수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가령 스포티파이의 경우 초반 기세는 좋았지만, 지금은 내가 보기엔 역사 속으로 사라질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규제 간 충돌도 난제 중 하나다. 빅테크의 독과점으로 인한 문제는 여러 규제 영역에 걸쳐서 나타난다. 제니 의장은 디지털 광고 시장을 예로 들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소비자 데이터를 독점한다는 경쟁법적 문제도 있지만, 개인정보 보호, 언론 생태계 악화 등 다양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는 “어느 한 규제만으로 이런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을 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어느 한쪽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런 사례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최근 구글과 애플은 개인정보 보호를 강화한다는 취지로 제3자 정보 제공을 제한하고 있는데, 이는 소비자 데이터에 대한 이들 기업의 독점으로 이어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제니 의장이 규제 간, 그리고
부처 간 조율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유다. 영국 경쟁시장국(CMA)과 정보위원회(ICO)는 지난 5월 디지털 경제에서 발생하는 규제 중첩 문제와 관련해 협업하겠다고 발표했다. 국내 상황과는 대비되는 셈이다. 그는 한국 공정거래위원회와 방송통신위원회 간 다툼도 우회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제재 권한을 두고) 규제당국끼리 경쟁을 하는 나라도 있는 걸로 안다”며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부처끼리 협업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재연 기자
ja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