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해운사(정기선사)들의 무분별한 담합에 칼을 빼들었다. 해운은 법에 규정된 요건을 지킨다는 전제로 담합이 허용되는 예외적 업종인데, 해운사들은 이런 요건을 무려 15년간 등한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동안 소비자들과 화주 업체들은 해운사들의 견제받지 않는 가격 담합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해운업계는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겠다”며 강력한 반발을 예고해 논란이 예상된다.
■ “해운사 담합, 성역 아니다”
공정위는 2003∼2018년 한국-동남아 항로의 운임 수준을 120번 합의한 혐의(공정거래법상 가격담합)로 국내외 해운사 23곳에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총 962억원을 부과한다고 18일 밝혔다. 담합을 독려한 것으로 조사된 사업자단체 ‘동남아정기선사협의회’에도 시정명령과 과징금 1억6500만원을 부과했다.
이번 사건은 공정위가 해운사 담합을 제재한 첫 사례다. 정해진 일정표에 따라 선박을 운행하는 정기선사들은 예외적으로 담합을 허용받아왔다. 정기 노선 영업을 위해서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데, 해운사 간 출혈 경쟁이 이뤄질 경우 도산하는 업체들이 속출해 화주와 해운사 모두 피해를 본다는 취지에서다. 다만, 국가마다 담합의 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사전 신고를 의무화하는 등 안전 장치를 두고 있다. 특히 최근
유럽연합(EU)은 아예 가격 담합을 금지하고 있다.
국내에선 이런 안전장치가 무력화돼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해운법은 해운사들이 담합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화주 단체와 충분히 협의하고, 담합의 내용을 해양수산부에 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해운사들은 18건의 느슨한 합의만 신고했을 뿐, 최저 기본운임을 정해놓는다거나 부대운임 도입·인상 등에 합의한 내용은 신고하지 않았다. 업계는 법에 규정된 의무를 무시하고, 해수부는 관리감독 의무를 저버리는 행태가 무려 15년간 지속됐다.
공정위 제재는 해운사 담합이 성역화돼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앞서 해수부와 해운업계는 공정위 제재를 무마하기 위해 해운사 담합에 무조건적인 면죄부를 주는
해운법 개정안을 추진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은 “‘화이부동’이라는 사자성어를 많이 생각했다”며 “해운업의 특수성과 중요성에는 공감하지만, 법이 허용하는 범위를 벗어난 반경쟁적 행위에 대해 엄정하게 법 집행을 해야 하는 경쟁당국의 역할은 변할 수 없다”고 말했다.
■ 과징금 대폭 깎아줬지만…업계, 반발 계속
공정위가 의결한 과징금은 예상됐던 최대 금액의 8분의 1 수준이다. 공정위 심사관은 이번 담합과 관련해 해운사들이 올린 매출액의 10%를 과징금으로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3개 해운사 과징금 총합은 8천억원대로 예상됐다. 위원회는 해운사들의 재무 상황과 시장의 특수성 등을 감안했다고 설명했다. 또 심사관 의견과 달리 수출 항로와 관련된 매출액만 포함시켰다. 수입 항로에선 주로 국외 화주들이 피해를 봤다는 이유로 제외했다. 수입 항로와 관련된 매출액은 전체의 30∼40% 수준이라고 한다.
다만, 국내 소비자 입장에서는 수입 항로에서 이뤄진 담합에 따른 피해가 더 클 수 있다. 수입 상품의 운임 인상이 소비자 가격으로 전가됐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위원은 “이런 간접적인 피해는 입증되기 어려운 데다 향후 해외 경쟁당국이 같은 건으로 제재할 경우 중복 제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해운 업계의 반발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한국해양산업총연합회는 이날 입장문을 통해 행정소송 계획을 밝히며 “우리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해양항만 업계는 특단의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고 했다. 공정위가 추가로 진행중인 한-일과 한-중 항로 담합 심사를 종결해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특단의 조치’로는 해운법 개정안 통과 등을 언급했다. 조홍선 공정위 카르텔조사국장은 “한-일과 한-중 항로는 조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심사보고서를 전원회의에 상정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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