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글로벌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소득보장체계 혁신방안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홍장표 한국개발연구원장.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 설계자인 홍장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이 임기를 2년여 남기고 원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한덕수 국무총리와 국민의힘의 사퇴 압박 때문이다. 한 총리가 지난달 28일 홍 원장을 겨냥해 “우리하고 너무 안 맞는다. 바뀌어야 한다”고 발언하기 전날, 감사원이 한국개발연구원 쪽에 이례적으로 대대적인 감사 자료 제출을 요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홍 원장은 6일 한 총리 발언에 대한 입장문을 냈다. 그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입장문은 사퇴의 변”이라며 “한 총리가 공개적으로 사의 표시를 요구해 공개적으로 답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홍 원장은 조만간 국무총리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에 사표를 제출할 예정이다. 지난해 5월31일 임명된 홍 원장 임기는 원래 오는 2024년 5월30일까지다.
한 총리는 앞서 지난달 28일 세종시 국무총리 공관에서 기자 간담회를 열어 “소득 주도 성장 설계자가 케이디아이 원장으로 앉아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우리 하고 너무 안 맞다. 바뀌어야지”라고 했다. 홍 원장의 자진 사퇴를 압박한 셈이다.
특히 한 총리가 이 같은 발언을 하기 하루 전인 지난달 27일 감사원은 연구원 쪽에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낸 것으로 파악됐다. 케이디아이는 매년 국무총리실 산하 국무조정실 또는 감사원을 통해 정기 감사를 받는다. 국무조정실과 감사원이 매년 초 감사 계획을 세울 때 연구원의 자체 감사 계획을 제출해 반영하는 방식이다. 이런 절차를 거쳐 감사원은 지난 2019년 11년 만에 케이디아이 감사를 했다.
올해 케이디아이 감사는 국무조정실과 감사원이 협의해 국무조정실이 진행하기로 이미 결정한 상태다. 그러나 감사원이 연구원 쪽에 기관의 일반 현황은 물론, 회계, 인사 등을 망라한 대대적인 자료 제출을 요구하며 감사 사전 조치에 착수한 것이다. 감사원의 연구원 직접 감사가 드문 일인 데다, 연초 감사 기관이 국무조정실로 정해졌던 터라 연구원 쪽도 이를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홍 원장도 이를 두고 “한 총리의 공개적인 발언이 있었고 감사원 공문이 날아왔다”며 “인과 관계는 모르지만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다. 감사원의 자료 제출 요구를 원장직 사퇴를 압박하는 ‘표적 감사’로 받아들인 것이다.
홍 원장은 이날 배포한 입장문에서 “국책연구기관이 정권 입맛에 맞는 연구에만 몰두하고 정권 나팔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국민 동의를 구해 법을 바꾸는 것이 순리”라며 “총리께서 정부와 국책 연구기관 사이의 다름은 인정될 수 없다며 저의 거취에 대해 말씀하신 것에 크게 실망했다”고 밝혔다.
홍 원장은 한 총리의 사퇴 요구를 “연구의 중립성과 법 취지를 훼손시키는 부적절한 말씀”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생각이 다른 저의 의견에 총리께서 귀를 닫으시겠다면, 제가 원장으로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정권이 바뀌고 원장이 바뀐다고 해서, 한국개발연구원과 국책 연구기관의 연구 보고서가 달라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총리께서는 부디 다름을 인정하시고 연구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폭넓게 청취하셔서 복합 위기를 극복하고 대전환의 시대를 선도하시길 소망한다”고 했다.
그는 윤석열 정부의 경제 정책 기조를 두고도 “대전환의 시대를 대비하기에는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홍 원장은 “윤석열 정부가 표방한 민간 주도 성장은 감세와 규제 완화를 핵심축으로 한 이윤 주도 성장이다. 대기업에는 감세 혜택을 주고 임금은 억제해서 이윤을 늘려줘야 경제가 성장한다는 것”이라며 “이는 지난 10년 전 이명박 정부 집권 초기에 표방한 ‘비즈니스 프렌들리’와 다르지 않다. 당시 이명박 정부도 적절하지 않은 정책임을 경험하고 이후 정책 기조를 동반성장과 공생발전으로 전면 전환했다”고 했다. 홍 원장은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도 지난해 의회 연설에서 ‘감세를 통한 낙수 경제학은 작동한 적이 없다’고 단언한 바 있다”고 덧붙였다.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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