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2차관(왼쪽)이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에이치제이(HJ)비즈니스센터에서 열린 ‘통신시장 경쟁촉진 정책방안 TF’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사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공
윤석열 대통령 말 한마디에 정책 방향이 ‘급선회’하거나, 설익은 정책이 ‘급발진’하는 일이 부쩍 늘고 있다. 국회에서 논의 중인 반도체 기업 세액공제 상향안이나 지난주 수면 위로 떠오른 금융·통신업 독과점 해소 방안 등이 대표적이다. 충분한 사회적 논의나 실무적 준비 없이 일단 가속 페달부터 밟은 정책 상당수는 ‘공회전’만 하거나 은근슬쩍 사라져, 정책의 예측 가능성과 정부 신뢰를 해친다는 지적이 나온다.
20일 국회와 정부 관계자들 말을 종합하면, 대기업이 반도체 시설 투자를 할 때 적용하는 세액공제율을 현행 ‘8+4%’(당기 시설투자액의 8% 기본공제+직전 3년간 연평균 투자액보다 많은 초과액 4% 추가 공제)에서 ‘15+10%’로 높이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이 2월 임시국회 중 통과될 가능성은 매우 낮은 분위기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6일에도 “2월 국회 처리를 간곡히 당부드린다”고 말했지만, 이틀 앞서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원회에서는 부정적 기류가 강했다. 윤석열 대통령 말 한마디로 정부 입장이 180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기재부는 여당이 당시 제시한 공제율 25% 안에 대해 ‘세수 감소 규모가 과하다’며 ‘8+4%’ 안을 고수했고, 그 결과 정부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러나 일주일 뒤인 지난해 12월30일 윤 대통령이 “반도체는 국가 안보산업”이라며 추가 확대 검토를 지시하자 나흘 만인 지난달 3일 ‘15+10%’ 안이 새롭게 발표됐다. 이 개정안은 국회에서 공회전만 하고 있다.
충분히 검토·검증되기도 전인 정책을 윤 대통령이 공개 석상에서 언급함으로써 급속 추진된 사안도 적잖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3일 국토교통부로부터 올해 업무계획 보고를 받던 중 정부 계획엔 없던 “미분양 주택 정부 매입 검토”를 지시해 시장을 뒤흔들었다. 곧바로 건설업계가 공개적으로 미분양 주택 매입을 요구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분양가 하향조정 등 업계 자구책이 빠진 정부 매입은 건설사 특혜”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논란은 원희룡 국토부 장관이 지난달 30일 기자간담회에서 “정부가 미분양 주택을 떠안을 단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고서야 다소 진정됐다.
“중산층 난방비 부담 경감 방안 적극 검토”도, 윤 대통령 지시가 앞서 나가고 장관 또는 참모들이 뒷수습을 한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달 30일 윤 대통령의 ‘중산층 지원 검토’ 지시 뒤에 한덕수 국무총리(2월7월 대정부질문, “취약자 지원에 집중해야 한다”) 등 정부 고위급 인사들이 ‘불끄기’에 나섰고,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정부의 기본원칙은 가장 어려움을 많이 겪는 에너지 취약계층을 두텁게 지원하고 사각지대를 없애는 것”이라고 매듭짓기를 시도했다.
윤 대통령의 말만 거창했을 뿐 새 정책 추진이 이뤄지지 않은 사례도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카카오 서비스 먹통 사태’ 직후 카카오를 “국가기반 인프라”로 표현하며 “독과점 구조에 국가가 필요한 대응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플랫폼 시장에서는 윤석열 정부의 ‘자율규제 기조’가 깨지는지 파악하고자 우왕좌왕했고, 공정거래위원회는 플랫폼 독과점 해소 방안을 대통령실에 보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고안은 대체로 문재인 정부 때부터 추진돼온 기존 과제들에 그쳤다.
지난주에는 은행과 통신업에 대한 윤 대통령의 공개 발언으로 업계가 혼란에 휩싸였다. 윤 대통령은 15일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금융·통신 분야 과점을 해소하고 경쟁 촉진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금융업의 경우 공공성 강화 문제를 시장 경쟁 촉진으로 푼다는 모순적인 발언에 ‘완전경쟁 체제’로 바뀌는 것이냐는 오해가 불거졌다. 금융당국은 온종일 추가 인가와 같은 ‘메기 효과’를 언급한 것이라는 수위 조절에 나서느라 진땀을 뺐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은행을 완전경쟁으로 가져가는 나라는 없다”며 “큰 골격을 흐트러뜨리는 게 아니라, 인터넷 전문은행처럼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메기를 집어넣어주는 효과를 생각하면 된다”고 윤 대통령 발언을 부연설명하기도 했다.
최하얀 기자
chy@hani.co.kr,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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