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을 올해보다 16.6%나 줄이면서 그 유탄을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이 맞았다. 연구기관과 연구자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알앤디 예산 원점 재검토 지시 뒤 두달 만에 이뤄진 삭감인 탓에 개별 사업별로 도려내진 예산 실태도 알지 못해 대혼란을 겪고 있다.
3일 ‘한겨레’ 취재 결과,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 47곳의 내년 예산은 올해보다 2901억4600만원(-7.8%) 줄었다. 국무조정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소속 정부출연연구기관들 예산 감액 폭(210억원·3.8%)을 크게 웃돈다. 구체적으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관 출연연구기관 16곳과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소속 연구기관 25곳에 지원하는 연구개발비가 올해(본예산)에 견줘 2743억4800만원(-7.9%) 줄었다. 원자력안전위원회 소관 연구기관 3곳 지원금도 11억8500만원(-2.5%), 해양수산부 소관 연구기관 3곳 지원금도 146억1300만원(-6.6%) 각각 삭감됐다.
각 기관의 연구자들은 자신이 속한 연구기관 예산이 어디서 얼마만큼 삭감됐는지를 몰라 대혼란에 빠져 있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예산 서류에서도 소관별·소속별 지원액이 묶음으로만 적시된 탓에 개별 기관의 예산 정보는 알기 어렵다. 한 과기부 출연연구기관 관계자는 “예산이 대폭 깎였다는 얘기는 주구장창 돌지만 어떤 연구가 폐지되고 살아남는지는 모른다. 내가 관여하는 연구 예산이 준다면 그 이유라도 듣고 싶다”고 토로했다.
정부가 개별 연구사업들의 목표와 성과 등을 꼼꼼히 따질 겨를 없이 삭감 총량 목표부터 세워놓고 접근했다는 점에서 연구자들 반발이 크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내놓은 2022~2026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미래사회 대응과 신산업 육성을 위한 알앤디 투자를 확대한다”고 밝히며 ‘2024년 알앤디 예산’을 올해 본예산에 견줘 약 8천억원 더 편성한다는 계획을 제시한 터였다. 이 기조는 올해 3월 확정된 ‘예산안 편성지침’에도 유지됐다. 그러다 부처별 예산 요구안이 기재부에 넘어가 심사가 한창이던 지난 6월 말, 윤 대통령이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알앤디 예산 원점 재검토’를 주문한 뒤 분위기가 급반전했다. 기재부가 예산을 각 부처로 돌려보내며 알앤디 예산의 30%를 삭감 목표로 제시했다는 증언이 쏟아진다. 알앤디 예산 감축이 두달 만에 졸속 진행됐다는 뜻이다.
또 다른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 관계자는 “누수 예산이 없진 않겠지만 일단 어디서든 줄이고 보자는 식이었다”며 “알앤디 사업 구조조정이 정말 필요한 작업이었다면 알앤디 사업 전반을 놓고 엄밀한 평가 작업이 먼저 이뤄졌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한 선임연구원은 “알앤디 예산을 정부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고가 장비가 필요한 기초과학 연구 분야는 아예 (해당 예산이) 모두 날아가서 난리다”라며 “내부카르텔이 문제라면 그걸 살펴야지 묻지마식 예산 삭감이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현안대응용 연구개발 사업 예산이 통째로 삭감돼 해당 연구기관은 물론 과기정통부 직원도 황당한 표정을 짓는 사례도 있다. 전파자원 이용 효율 증대를 위한 국내 주파수 관리 관련 연구개발 예산(8억9천만원, 국립전파연구원 배정 예정 예산)이 그런 예다. 성주영 과기정통부 공무원노동조합 위원장은 “내년에 기술 기준이 조금이라도 바뀌면 간섭 실험 같은 것을 해야 하는데 관련 예산이 전액 삭감됐다. 현장에서는 어이없어한다”며 “기획재정부에서 ‘묻지마’식 예산 삭감을 강요하며, 과기부에 삭감 사유와 논리를 만들라고 한 거로 안다”고 말했다.
범과학계가 연대기구를 구성해 공동 대응에 나설 조짐이다.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전국과학기술연구전문노동조합, 출연연과학기술인협의회총연합회 등은 오는 5일 기자회견을 여는 등 집단행동을 예고한 터다. 이어확 전국과학기술연구전문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장기적으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이나 우리나라 국가 경쟁력에 위기감을 느끼다 보니 노선 차이를 떠나 모든 단체들이 함께할 것 같다”며 “과학의 미래를 살리기 위한 ‘격문’을 쓰고 ‘봉화’를 올리는 각오로 문제의 심각성을 호소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최하얀 안태호 정인선 임지선 기자, 김정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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