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재계를 대표하는 게이단렌(경단련)은 지난 11일 미타라이 후지오 회장(캐논 회장)을 단장으로 한 대규모 방문단을 5일간의 일정으로 중국에 파견했다. 방문단에는 경단련 차기 회장인 요네쿠라 히로마사 스미토모화학 회장을 비롯해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 최고경영자가 14명이나 참가했다. 게이단렌이 독자적으로 중국에 방문단을 보낸 것은 5년 만의 일이다. 대표단은 이번 방문에서 원자바오 총리 등 중국 정부 요인들과 만나, “일본 경제계의 리더들이 해마다 적어도 2차례 중국방문을 정례화하겠다”고 밝혔다. 게이단렌의 이런 움직임은 일본이 중국,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신흥국으로 빠르게 눈을 돌리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제조업을 무기로 내세워 지난 1968년 독일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자리에 오른 일본에게 ‘신흥시장’은 오랫동안 무시의 대상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일본 기업들은 뛰어난 품질을 앞세워 주로 선진국 시장만을 상대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일본은 해마다 엄청난 무역흑자를 쌓았다. 중국시장에 일찍 진출했다가 실패를 맛본 경험도 일본으로 하여금 신흥시장과 거리를 두게 한 요인이다. 이랬던 일본을 변화하도록 만든 계기는 ‘선진국 경제의 침체와 신흥시장의 부상’이다. 특히 2008년 터진 리먼브러더스 사태는 일본경제에 결정적인 분기점이 됐다.
세계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일본경제를 지탱해온 선진국 수출은 급격하게 감소했다. 사태가 터진 지 석 달 만인 2008년 11월 일본의 대미수출은 전년동월 대비 33.8%, 전체 수출은 26.7%나 줄었다. 노구치 유키오 와세다대학 교수는 이런 통계가 발표된 지난해 1월 경제주간지 <다이아몬드>에 기고한 글에서 “제조업 수출입국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일본의 수출은 그 뒤에도 더욱 깊은 추락을 경험했다.
하지만 일본 경제에 최근 다시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곳은 다름아닌 신흥시장이다. 특히 중국·인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신흥시장이 일본경제에 ‘복음’이 되고 있다. 신코종합연구소는 “도쿄증권거래소 1부 시장 상장기업들이 5월12일까지 발표한 3월 말 실적을 최근 집계해보니 2년 만에 흑자로 돌아선 것으로 나타났다”며 “이를 이끈 것은 중국을 필두로 한 신흥국의 수요 확대였다”고 설명했다. ‘이젠 신흥시장 없이는 일본 경제를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진다.
일본 기업들은 아시아 신흥국을 선진국 시장을 대체할 ‘판매시장’으로만 여기는 것은 아니다. 생산기지 구실도 빠르게 키우고 있다. 자동차업체들의 움직임은 특히 두드러진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지난 23일 일본 대기업의 올해 설비투자 계획을 집계한 것을 보면, 도요타는 올해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지역 설비투자액을 지난해의 2.2배인 900억엔으로 책정했다. 올해 전체 설비투자를 지난해보다 15% 늘리기로 한 혼다는 중국에 신공장을 건설하고 기존 공장을 확대해 중국 생산능력을 30%나 키우기로 했다.
이런 움직임은 생산비용을 낮추려는 게 가장 큰 목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최근 위기를 겪은 ‘도요타 사태’와 비슷한 품질 위험을 다른 일본 기업에까지 확산시키는 것은 아닐까? 박원주 주일대사관 상무관은 “일본 기업들은 도요타 사태를 거치면서 마구잡이 비용절감의 위험성을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한다. 그는 “일본 기업들이 가격뿐 아니라 품질 또한 함께 중시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품질을 인정받는 우리나라 기업들로서는 좋은 협력 기회가 열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1955년 이후 계속된 자민당 독주시대를 마감하고 지난해 9월 등장한 일본 하토야마 내각은 이른바 ‘동아시아 공동체’를 핵심 외교정책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수사만은 아니다. 일본 경제를 위해서도 아시아 국가와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진척시키기 위해 일본이 풀어야할 과제는 시장 개방이다. 일본은 소비재의 7%가량만 외국에서 수입해 쓸 정도로 폐쇄적이다. 특유의 상관행 등 비관세 장벽을 일본이 허물어간다면, 아시아 국가들과의 경제협력은 더욱 빠르게 확대될 것이다.
도쿄/정남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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