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의료장비 등 핵심사업 추려 중장기투자
‘누구나 쉽게’ 눈높이 낮춘 ‘생활속 명품’ 탄생
‘누구나 쉽게’ 눈높이 낮춘 ‘생활속 명품’ 탄생
위대한 기업을 찾아서/① 필립스 한국에도 좋은 기업은 많다. 하지만 정작 위대한 기업을 찾기는 쉽지 않다고들 한다. 우리 기업이 글로벌시장에서 초일류기업으로서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좋은 기업을 뛰어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나아가갸 한다. 세계적으로 위대한 기업의 반열에 근접해 있는 글로벌 기업들을 찾아 그 비결을 살펴봄으로써 우리기업들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모색해본다. ‘파산 직전의 회사에서, 세계 최고의 지속가능한 회사로’ 지난 1990년, 네델란드에 본사를 둔 전자기업 필립스는 멸종 직전의 공룡과도 같았다. 전자 외에 음반·부동산 등 60개 사업분야에 직원수만 29만명을 헤아리던 필립스는 창사 100주년을 한해 앞둔 시점에서 주가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곤두박질치고, 한해 경상적자만 27억달러에 육박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기술이 문제가 아니었다. 1891년 조명기기 제조업체로 출발한 필립스가 카세트 테이프 시스템에서 3중 헤드 전기 면도기, 시디(CD)에 이르기까지 1만건이 넘는 발명품을 내놓으며 최첨단 기술을 선도해왔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기술이 수익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80년대부터 일본 기업들은 필립스의 기술에 ‘저스트 인 타임’ 방식으로 생산성을 높이고 발빠른 마케팅까치 펼치며 시장을 잠식했다. 반면 기술적으로 우수한 평가를 받은 필립스의 비디오 표준 ‘V-2000’과 레이저디스크, 시디-인터랙티브(CD-i) 등은 모두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했다. 신임 얀 티머 필립스 회장은 외부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중에는 향후 ‘블루오션’ 이론으로 유명해진 인세아드의 김우창 교수 등이 포함됐다. 수백명의 전문가들이 내린 결론은 ‘필립스가 소비자들 위에 군림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모토가 ‘필립스가 당신을 위해 발명한다(Philips Invent for You)’였습니다. 얼마나 오만합니까. 소비자들은 첨단 기술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사용하기 편리하고 단순한 물건을 원했는데, 저희는 그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구조조정 작업에 참여한 신박제 필립스코리아 사장은 말했다. 전문가들은 또 방대한 회사구조가 의사결정을 지연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 필립스에서는 유사한 프로젝트를 복수의 연구팀이 수행하고, 생산기지도 중복되는 경우가 많았다.티머 회장은 60개 사업분야를 가전·소형가전·조명·반도체·의료장비 등 5개로 추려내고, 흩어진 생산기지를 통폐합했다. 인원 감축만 5만여명, 백색가전과 컴퓨터 분야를 정리했고 흑자를 내고있던 음반사 폴리그램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 사장은 “당시 필립스는 이익을 많이 내더라도 전략적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과감히 매각하는 길을 선택했다”며 “확보된 자금은 반도체와 의료장비 등 핵심분야에 집중 투자했다”고 회고했다. 핵심 슬로건 역시 바뀌었다. 90년대 중반 이래 필립스는 ‘Let’s Make Things Better’(한국에서는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듭니다’로 번역)로 ‘함께하는’ 기술을 강조했다. 2003년부터는 이를 한층 더 발전시켜 ‘Sense and Simplicity’(상식과 단순함)를 전사적인 모토로 채택했다. ‘쉽고’ ‘고객의 필요에 맞으며’ ‘발전된 기술’을 선보이겠다는 필립스의 새로운 포부가 잘 나타나는 제품으로는 휴대형 심장박동소생기가 있다. 심장마비 환자는 5분 안에 소생이 필요하지만 응급차가 오는데는 평균 9분이 걸린다는데 착안해 만든 이 상품은 어린이도 쓸수 있을 만큼 조작이 쉽다. 이 기기는 미국의 시민단체들이 학교와 운동장 비치용으로 대거 구매할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의 과정을 거치며 ‘지속가능한 경영’은 회사가 추구하는 핵심가치가 됐다. 필립스는 환경분야에서 94년부터 ‘그린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100여개의 친환경 상품을 출시하고 전사적으로 자원 낭비와 물 소비를 50~60% 줄였다. 지난해에는 노동 분야에서 ‘협력업체 지속가능경영 선언’을 발표했다. 협력사들에게도 아동 노동력 착취 금지와 노조가입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로 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필립스는 2003년부터 다우존스 지속가능성 평가에서 재활용품 및 서비스부문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필립스는 지난 76년 한국에 진출했다. 필립스코리아는 외환위기 직후인 99년 엘지필립스엘시디에, 2년 뒤 엘지필립스디스플레이에 수십억달러를 투자하며 세계 1, 2위의 디스플레이 업체로 키웠다. 또 자동차조명부문 아시아물류센터를 프랑스에서 경기도 안산으로 옮겨왔다. 한국에서도 인력감축 위주의 구조조정이나 단기이익을 꾀하는 사업방식보다 중장기 설비투자 등에 중점을 두는 ‘지속가능한 필립스 경영방식’을 적용하고 있다고 신 사장은 강조한다. “더욱 치열해지는 전자시장에서 ‘생존’은 저희에게 여전히 중요한 화두입니다. 하지만 돈을 버는데만 열중하는 고루한 방식으로는 살아남기 힘듭니다. 고객들이, 시민 사회가 저희를 감시하기 때문이죠. 이제는 우리 기업들도 어떻게 더 좋은 기업 시민(corporate citizen)이 될지 구상해야 할 때입니다.”
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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