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실련,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등 시민사회단체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 회원들이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가습기 살균제 제조기업 처벌 촉구 및 ‘옥시 제품 불매’ 운동에 돌입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사회책임경영 3관왕 오른 영국 본사
진출 국가마다 다른 기준 적용
한국서만 10년간 가습기 살균제 판매
법망 피하려 유한회사로 바꾸고
원자재물질 공개도 한국 등 외면
국제협약·각국 법제화 등 시급
진출 국가마다 다른 기준 적용
한국서만 10년간 가습기 살균제 판매
법망 피하려 유한회사로 바꾸고
원자재물질 공개도 한국 등 외면
국제협약·각국 법제화 등 시급
지난해 ‘유한회사 RB코리아’(이하 옥시)의 영국 본사 ‘레킷벤키저’는 사회책임경영 3관왕을 달성했다. ‘다우존스지속가능발전 지수’(DJSI), ‘푸치포굿 지수’(FTSE4GOOD 인덱스)에 연거푸 편입된 데 이어,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한 ‘지속가능경영 100대 기업’에서도 생활용품 판매 기업 가운데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이번 옥시 사태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간 소비자를 향해 보여줬던 레킷벤키저의 각별한 제품 책임 의식 때문이다. 이들은 2001년 이후, ‘사용 제한 물질 리스트’를 통해 소비자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물질들을 자체 관리하고 있으며, 지난해엔 소비자 안전을 위해 투명한 제품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소비자 안전과 의약품 관리’라는 연구개발팀이 조직됐다.
이처럼 기업이 다해야 할 사회적 책임에 누구보다 투철한 신념을 갖고 있던 이들이 어떻게 지난 10여년 동안 한국에서만 무려 453만개에 이르는, 인명 살상 수준의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할 수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다국적기업 레킷벤키저가 본사와 한국 지사(옥시)에 적용한 기업 경영기준이 서로 다른 이른바, ‘이중 기준’이 큰 영향을 끼쳤다. 이중 기준이란 선진국에 소재한 다국적기업이 본사와 외국 지사에 서로 다른 제도와 원칙을 적용하는 것을 일컫는다. 개별 국가마다 화학물질 취급 기준이 제각각인데, 다국적기업마다 자사에 유리한 방식의 기준을 택하면서 이중 기준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2015년 레킷벤키저가 발간한 지속가능성보고서를 살펴봤더니 환경, 사회, 지배구조 등 기업이 다해야 할 사회적 책임 전반에서 이중 기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환경 영역에서 레킷벤키저는 영국 본사에선 등록되지 않은 화학물질의 시장 판매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1998년 유럽연합(EU)이 제정한 ‘화학물질 관리제도’(REACH)를 준용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선 제품의 유해성이 발견되더라도 유해성의 책임 소재를 가려내기 어려운, 개정 전 국내 ‘화평법’(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했다.
제품에 사용되는 원자재 물질을 공개하는 데 있어서도 본사와 지사 간 기준은 달랐다. 영국 본사는 ‘2015 지속가능성보고서’를 통해 2020년까지 자사 제품에 사용되는 모든 원자재 물질을 100% 공시하겠다고 밝혔지만 대상 국가는 정해져 있었다. 레킷벤키저가 자사 제품의 원자재 물질을 공개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운영 중인 누리집(홈페이지)은 세계 200여 판매국 가운데 유럽, 북미, 오스트레일리아(호주)뿐이다. 한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엔 적용되지 않았다.
레킷벤키저의 이중 기준은 지배구조에서도 드러난다. 지난 2014년 유럽연합 결의에 따라 500인 이상 사업장인 레킷벤키저는 이사회 내 여성 비율(약 29%), 경영진의 국적(49개국) 등 지배구조 정보를 투명하게 밝히고 있다. 반면, 옥시는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사건 이후 ‘RB코리아’로 사명을 바꾼 데 이어 법인격도 주식회사에서 유한회사로 전환했다. 개정된 상법에 따라 유한회사의 설립기준이 완화되면서 옥시가 외부감사와 공시 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게 된 것이 크게 작용했다. 본사의 지배구조 관련 규정은 엄격해지고 있는 반면, 한국 지사는 5년 전 사태 발생 이후 (비)재무 정보 공개 책임을 회피해 왔다. 최근 정부 규제개혁위원회가 유한회사도 외부감사를 받도록 권고했지만 여전히 공시 의무에선 자유롭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이중 기준을 사전에 방지하거나 보완할 방안은 없을까?
국제적 수준의 지침과 협약을 마련하고, 개별 국가들은 이 기준에 부합하는 법제화에 나설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이종오 사무국장은 “폐기물 국제관리기준인 바젤협약처럼, 환경의약 품목에서도 인류 공동의 가치를 지켜갈 국제협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더 근본적으로는 다국적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태도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이영면 교수(동국대 경영학부)는 “국내법과 견줘 강제성이 덜한 국제협약이 제대로 이행되기 위해선 다국적기업 내부의 실행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서재교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CSR팀장
jkse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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