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맨 오른쪽)이 24일 오전 서울 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이날 회의에서는 최근 고용·경제 상황에 따른 대책을 논의해 발표했다. 연합뉴스
기업들이 내년 상반기까지 건물·공장 건립에 6조원 이상을 앞당겨 투자할 수 있도록 정부가 앞장선다. 국외에 진출한 대기업이 국내로 복귀하면 중소기업 수준으로 세제 혜택을 주기로 했다. 또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자동차부품업계에 신용보증·기술보증기금의 우대 보증 1조원을 공급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고용·투자 상황 등을 고려할 때 응급 처방은 필요하지만 이미 ‘골든타임’을 놓친데다 실효성과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대기업 중심의 투자 활성화 정책과 단기적인 경기부양책이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와 충돌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24일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최근 고용·경제 상황에 따른 혁신성장과 일자리 창출 지원방안’을 확정·발표했다. 김 부총리는 회의 머리발언에서 “우리 경제는 수출·소비는 견조하나 민간투자가 급격히 위축되고 고용은 하반기에 한 자릿수 증가에 그치는 등 어려움이 지속됐다”며 “경제 역동성 회복을 위한 혁신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위한 선제 대응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지원대책을 내놓은 배경을 설명했다. 제조업 구조조정으로 업황 불확실성이 커지는데다 반도체 투자가 일단락되면서 경제성장·일자리 창출과 직결된 기업 투자가 감소하고 있다는 게 정부의 진단이다. 고용창출력이 높은 건설투자도 사회간접자본(SOC) 위축 등으로 부진하다고 정부는 보고 있다.
이에 정부는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 등 민간·공공투자 추진 △원격의료·공유경제 확대 △공공기관 맞춤형 일자리 5만9천개 창출 △유류세 15% 인하 등 투자 활성화 및 단기 일자리 지원대책을 내놓았다. 지난달 경제관계장관회의 이후 당·청 협의 5차례, 경제현안 간담회 4차례 등을 거쳐 이번 대책이 마련됐다.
우선 정부가 지원하는 대규모 민간투자 프로젝트는 1단계로 내년 상반기까지 기업들이 2조3천억원을 투자해 공장 등을 증설하도록 관련 규제를 풀어주는 것이다. △포항 영일만 공장 증설(1조5천억원) △여수 항만 배후단지 개발·공급(3500억원) △여수 국가산업단지 입주기업 공장 증설(4500억원) 등이 포함된다. 2단계 사업은 마이스(MICE)·문화 기능 등을 갖춘 복합 업무시설 건설로 투자 규모는 3조7천억원이다. 마이스란 회의·포상관광·컨벤션·전시회를 연계한 융복합 산업을 말하는데,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잠실종합운동장까지 이어지는 ‘서울 국제교류복합지구 사업’이 대표적이다. 이와 관련해 현대·기아차그룹이 2014년에 사들인 서울 강남구 옛 한국전력공사 터에 추진하려고 하는 105층짜리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신사옥이 지원 대상으로 거론된다. 현대차그룹의 숙원인 이 사업은 국토교통부에서 3차례나 보류됐다. 국토부는 인구 유발 효과 등에 대한 분석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제론 강남 개발에 따른 부동산 가격 급등 우려가 사업 보류 배경이 됐다는 말이 나온다.
정부는 또 올해 안에 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을 통해 15조원 규모의 금융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하기로 했다. 중소·중견기업의 산업구조 고도화나 환경·안전을 위한 시설투자를 촉진하기 위해서다. 최근 구조조정으로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자동차부품업체의 경우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때 신·기보가 보증하는 비율을 85%에서 90%로 올리고, 보증료율도 평균 1.3%에서 최대 1.0%로 인하한다.
국외에 진출한 대기업이 국내로 복귀하면 법인세·관세를 최대 100% 감면하고 입지·설비 보조금도 기업당 최대 100억원까지 지원하는 내용도 이번 대책에 담겼다. 유턴 기업 지원제도는 원래 중소·중견기업을 위한 것인데, 내년부터 그 대상을 대기업으로 확대한 것이다. 이와 함께 경남 창원 등에 스마트산업단지를 구축하고, 주요 공공분야 투자도 내년에 8조2천억원 확대하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제조업 구조조정, 고용부진 등 심각한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단기 관리 대책은 필요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정세은 충남대 교수(경제학)는 “제조업 등 주력산업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부품업체는 파산 직전에 몰려 정부의 자금 지원이 절실하다”며 “공장 주변 상권도 망가지고 서비스업 고용도 줄어들어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등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대책이 과거 정부의 경제정책으로 회귀하는 신호탄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박근혜 정부는 ‘무역투자진흥회의’를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며 기업의 투자 집행을 앞당기도록 요구하고 자동차에 붙는 세금을 깎아주며 소비 진작을 독려했는데, 최근 문재인 정부의 행보가 이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자동차 개별소비세에 이어 유류세까지 내렸고 기업이 공장·건물 등을 조기 착공하도록 규제를 풀고 있기 때문이다.
신관호 고려대 교수(경제학)는 “규제를 푸는 게 필요하지만 투자 자체가 낮은 상황은 아니다. 다만 어떤 투자인지가 중요하고, 그 내용을 제대로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배근 건국대 교수(경제학)는 “대규모 민간투자 프로젝트도 한진그룹의 경복궁 특급호텔 건설처럼 일자리 창출과 거리가 먼 ‘소원 수리성 규제 완화’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반면 우석진 명지대 교수(경제학)는 “소득주도성장이란 소득을 올려 소비를 늘리고 그로 인해 생산을 확대하는 것인데, 정부가 그동안 소득 증대에 집중했다면, 소득주도성장을 완성하기 위해 투자 활성화를 논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투자 확대 정책이 지나치게 늦게 나온데다 구체성이 부족해 고용 창출 등 정책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조영철 고려대 초빙교수(경제학)는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초과세수, 주력산업 구조조정 등 정책 변수를 빨리 인지하고 지난 6월께 2차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으로 대처했다면 ‘고용 참사’ 등을 충분히 해소할 수 있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고 비판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그동안 공공부문 일자리를 강조했는데 민간투자를 활성화하고 규제를 완화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방향은 긍정적이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내용이 없어 실효성은 의문”이라고 말했다.
정은주 허승 방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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