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일 경기도 화성사업장에서 열린 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동훈 삼성디스플레이 사장, 이 부회장, 김기남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 부회장, 정은승 삼성전자 디에스부문 파운드리 사업부장(사장). 삼성전자 ‘블라인드’ 앱 갈무리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사기 및 관련 증거인멸 의혹에 대한 수사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오늘(11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최측근 정현호 삼성전자 사업지원티에프(TF) 팀장(사장)을 검찰이 소환했는데요. 이제 남은 사람은 불법 승계 의혹의 당사자, 바로 이재용 부회장입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송도 공장 바닥에 서버와 노트북을 은닉했다’ 등 여러 보도가 최근 몇 달간 이어져왔습니다. 그 사이 삼성 바이오 계열사 실무진은 물론 삼성전자 부사장 3명이 구속됐고요. ‘증거인멸’에 대한 내부 진술이 나온 뒤 검찰 수사는 갈수록 속도를 높이고 있죠. 이런 가운데 삼성이 5월 말부터는 이례적으로 반격에 나섰습니다. ‘보도자료’ 또는 ‘참고자료’라는 이름으로 “무리한 보도를 자제해달라”고 언론에 요청했는데, 자료를 낸 주체는 ‘삼성전자’였습니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언론을 대상으로 낸 자료지만 사실상 검찰을 향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두 차례 ‘보도 자제 요청’ 자료가 나왔는데요. 시점이 눈에 띕니다.
처음은 5월23일이었습니다. “추측성 보도가 게재되며 진실 규명 초기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유죄라는 단정이 확산되고 있다”, “임직원과 회사는 물론 투자자와 고객들도 돌이킬 수 없는 큰 피해를 입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날은 <경향신문>이 ‘단독’ 보도를 한 날입니다. <경향신문>은 5월23일자 1면에
삼바 수사 전 삭제한 파일 ‘부회장 통화 결과·보고’ 있다 는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검찰 수사에 대비해 삼성 쪽에서 삭제한 파일에 ‘부회장 통화’가 등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검찰이 디지털 포렌식 등을 통해 삭제 파일을 복원하면서 알려진 내용이었습니다. 증거인멸 관련 실무급 ‘내부 증언’이 하나 둘 터져나오는 가운데 처음으로 이 부회장을 수면 위로 올린 보도였습니다.
두번째는 어제(10일) 밤이었습니다. <에스비에스>(SBS) 8시 뉴스의 단독 보도였는데요.
‘증거인멸 결정’ 회의 5일 뒤 → 이재용 주재 회의 보도 입니다. 삼성 임원들은 지난해 5월5일 모여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사기 수사와 관련해 증거 인멸을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데요. 여기까진 기존 보도가 여러 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비에스>는 5일 뒤인 5월10일 이재용 부회장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집무실로 사용됐던, 서울 이태원동 ‘승지원’에서 정현호 사장과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사장 등을 불러 회의를 주재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삼성 관계자는 이 자리에서 금융감독원 감리 결과에 대한 대응 방안과 콜옵션 지분 재매입 방안 등을 이 부회장에게 보고했다고 검찰에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에스비에스>는 전했습니다.
삼성전자는 어제 밤 9시6분 ‘다시 한 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참고자료’를 냈습니다. “중장기 사업 추진 내용 등을 논의한 자리였지 증거인멸이나 회계 이슈를 논의한 회의가 전혀 아니었다”, “이런 보도들로 회사와 투자자에게 큰 피해가 우려되고 있고 경영에도 집중하기 힘든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의 사실과 장소, 참석자 등은 맞지만 내용은 아니라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삼성전자는 회계사기 및 증거인멸 의혹에 대한 숱한 보도 가운데 이 부회장의 개입 정황이 직접적으로 거론된 단독 보도들에 대해서 ‘총력 대응’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검찰이 대대적인 수사를 벌일 때 해당 기업이 반박이나 항변 자료를 내는 일은 이례적인 일로 여겨지는데요. 그만큼 “두 보도가 중요한 내용이었다는 반증”이란 평가가 나옵니다.
참, 삼성전자는 지난 2일에도 ‘참고자료’를 냈죠. 일요일이었는데요. 전날인 토요일(1일) 이재용 부회장이 전자 관계사 사장단과 화성사업장에 모여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글로벌 경영 환경을 점검하고 대책을 논의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50년간 지속적 혁신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어려운 시기에도 중단하지 않았던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작년에 발표한 3년간 180조원 투자와 4만명 채용 계획은 흔들림 없이 추진해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활성화에 기여해야 한다” 등 이 부회장의 ‘당부’들이 참고자료에 담겼습니다. 엄중한 경제 위기 상황에서 이 부회장이 주말에도 쉬지 않고 고삐를 조였다는 취지로 보도되었죠. 물론 이를 두고 이 부회장의 승계를 둘러싼 검찰 수사, 대법원에 계류중인 재판을 의식한 ‘의도된 행동’이라는 해석도 나왔습니다.
이날 이 부회장의 행보는 삼성전자 직원들의 ‘익명 게시판’인 ‘블라인드 앱’에 관련 사진들이 올라오며 널리 알려지게 됐는데요. 익명의 누군가가 올린 사진들에는 이 부회장이 김기남 삼성전자 디에스(DS)부문 부회장, 이동훈 삼성디스플레이 사장 등과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여러 각도로 담겨 있었죠. 이에 언론들은 ‘삼성전자 블라인드 앱’를 출처로 표기하며 보도해야 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네요. 여기서 갑자기 드는 궁금증, 블라인드 앱에 사진은 누가 올렸을까요?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