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8일 핀란드 집권 사회민주당 연정의 총리 경선에서 34살의 산나 마린 사회민주당 의원(왼쪽)이 승리한 직후 경쟁자였던 안티 린트만 원내대표와 손을 맞잡고 있다. 산나 마린 당선자는 핀란드의 세번째 여성 총리이자, 전세계를 통틀어 최연소 정치지도자 기록을 세웠다. 헬싱키/로이터 연합뉴스
새달 15일 열리는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각 당마다 한바탕 청년 인재 영입 열풍이 불었다. 하지만 각 당의 공천 작업이 거의 마무리된 지금 되돌아보면, 정작 구호만 요란했을 뿐 성적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정치적 자산이 부족한 청년 후보들은 경선에서 살아남기가 버거웠고, 기성 정치세력으로부터 선택받은 극소수만이 비례대표 후보 우선순위에 올라 국회 진출을 노리고 있다. 선거 때마다 부는 청년 정치 바람의 명맥은 으레 다음 선거까지 꾸준히 이어지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풍경이다.
시야를 나라 밖으로 돌려보면 어떨까. 정답은 ‘완전히 다르다’이다. 국제무대에선 청년이 그 나라 정치의 주류를 당당히 형성하고 있어서다. 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39살의 나이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가 2001년 초선 의원이 됐을 때 나이는 37살이었다. 전임인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도 2001년 35살에 하원의원에 처음 당선됐다. 이뿐 아니다.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도 39살에 퀘벡주 몬트리올 하원의원이 된 후, 당대표를 거쳐 총리 자리에 올랐다. 43살 때다. 심지어 스웨덴의 구스타브 프리돌린 전 교육부 장관은 19살 나이에 초선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 국회의원 후보 평균 나이 46.9살, 여성 42%
근래에 가장 주목받는 건 핀란드의 청년 정치다. 핀란드는 지난해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이 승리한 이후, 지난해 연말엔 전세계 현역 정치지도자 중 최연소인 34살의 산나 마린을 신임 총리로 선출했다. 사민당은 중앙당, 녹색당, 좌파동맹, 스웨덴인민당 등 4개 정당과 연합정부를 구성했다. 4개 정당의 당대표 역시 모두 여성이고, 이 중 3명이 30대다. 산나 마린 총리가 발표한 내각 구성원의 평균 연령은 48.5살. 전체 18명의 장관 가운데 11명이 여성이다.
지난해 4월 200석의 주인을 찾는 핀란드 국회의원 선거에선 모두 2468명의 후보자가 출사표를 던졌다. 남성 후보는 1432명, 여성 후보는 1036명이었다. 여성 후보의 비율은 42%로, 4년 전인 2015년 선거 때보다 2.6%포인트 높았다.
후보자들의 평균 연령 역시 46.9살에 불과했다. 성별로 나눠보면 남성 후보 47.9살, 여성 후보 45.5살이었다. 전체 후보자 중 40살 미만이 차지하는 비중은 32%(793명)로, 25살 이하도 137명이나 됐다. 핀란드에서는 18살부터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의회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지난해 선거에서 선출된 국회의원의 평균 연령은 46살. 이 가운데 8명이 30대 미만이다. 최연소 국회의원은 녹색당의 이리스 수오멜라 의원으로 24살이다. 여성 당선자도 92명이나 배출했다. 전체 의석 200석 가운데 46%를 여성이 차지한 것으로, 역대 가장 높은 비중이다. 선거 결과를 두고 핀란드 공영방송(YLE)은 핀란드 국회가 여전히 중년 남성이 다수이며 이전 선거에서 30대 국회의원이 14명 당선된 것에 비해 젊은 새 정치인이 줄어들었다는 냉정한 평가를 하기도 했다.
■ ‘내게 딱 맞는 후보’ 가리는 ‘발리코네’
이제 나라 안으로 다시 시야를 돌려본다면? 지난 20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자 통계를 살펴보면 청년 정치와 여성 정치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성별과 나이를 고려해 당선 순위를 매기는 각 당의 비례대표 후보를 제외하면, 전체 지역구 후보자(934명) 중 남성은 836명으로 압도적이었다. 여성 후보자는 98명뿐이었다. 40대 미만 후보자 비중은 7%(70명)에 그쳤고, 실제로 당선된 후보는 김해영(당선 당시 39살)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유일했다. 40대 미만 의원으로는 신보라(당시 33살) 새누리당(당시) 의원, 김수민(당시 29살) 국민의당 의원도 있지만, 두 사람은 각 당의 청년 인재 영입 몫으로 비례대표에서 우선순위를 받아 국회에 입성한 경우다. 20대 국회의원 당선자 평균 연령은 55.5살이었다.
한국과 핀란드 두 나라의 정치 풍경은 너무도 다르다. 이처럼 핀란드에서 청년 정치인, 특히 젊은 여성 정치인들이 현실 정치의 주류를 형성할 수 있는 이유는 무얼까. 그 해답은 진입 장벽이 낮은 개방형 권역별 비례대표제로 치러지는 선거제도와, 기성 정당의 들러리가 아닌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력한 청년조직에서 찾아야 한다.
핀란드 공영방송(YLE)이 운영하는 발리코네 시스템의 모바일 버전. 유권자들은 다양한 정책에 대해 자신과 생각이 같은 후보자들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당에서 공천권을 행사하지 않는 핀란드의 제도는 청년 정치인에겐 큰 힘이 된다. 핀란드의 국회의원 선거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로 치러진다. 전국을 13개 권역으로 나누어 8~36석(올란드섬 자치제도는 1석)까지 의석을 분배한다. 각 정당은 후보자 명부를 작성하는데, 후보자의 순번은 당에서 정하지 않는다. 유권자가 직접 지지하는 후보자를 투표용지에 표기하고 그 득표수에 따라 후보자의 순위가 정해진다. 그리고 각 당의 후보자들이 받은 최종 득표율에 따라 정당이 차지하는 의석수가 정해진다.
한 지역구에서 단 한명의 승자를 가리는 방식이 아니다 보니, 당에서 당선 가능성이 큰 후보자를 전략공천하거나 경선을 해 단 한명의 후보자만을 낼 필요가 없다. 후보자에게 전과 등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는 한 핀란드 정당들은 당원이 선거에 나서기를 원한다면 대부분 수용하는 편이다. 사실상 진입 장벽 없이 청년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이 정치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셈이다.
한 지역구에서 수백명이 출마하면 후보자 난립으로 혼란을 초래하지는 않을까. 핀란드가 찾은 해법은 유권자와 후보자 간의 의견 일치도를 확인할 수 있는 독특한 시스템. 유권자가 핀란드 공영방송(YLE)이 운영하는 ‘발리코네’(Vaalikone) 시스템을 이용해 기후변화와 환경·경제·보건·교육·이민자·안보 등 여러 정책에 대해 답을 하고, 자신의 의견과 유사한 답을 낸 후보자 명단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후보자의 간단한 이력과 후보자가 직접 만든 자기소개 동영상도 볼 수 있고, 후보자가 해당 질문에 어떤 답을 했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발리코네 링크 연결).
■ 34살 총리 “난 정치경력 이미 10년 넘어”
핀란드에서는 경험 부족을 들어 청년 정치인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핀란드의 각 정당마다 탄탄한 청년조직을 운영하면서 구성원들에게 실질적인 힘을 실어주고 있어서다.
핀란드 원내 정당 9개는 저마다 청년조직을 갖고 있다. 대부분 15살 때부터 가입할 수 있다. 청년조직은 각 지역위원회를 두고 당원으로서 지역사회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을 하도록 적극 장려한다. 청년들도 이를 발판 삼아 시의원부터 차곡차곡 정치경력을 쌓으며 중앙 정치 무대로 진출할 준비를 한다. 당에서는 청년조직 대표들에게 당의 부대표 등 요직을 맡겨 일찌감치 정치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산나 마린 총리의 경험이 많은 걸 말해준다. 2004년 탐페레대학에 입학한 그는 21살 때인 2006년부터 사민당 청년조직 활동을 시작했다. 2010년부터 2년 동안 청년조직 부단장을 맡았고, 사민당 위원회 멤버로도 활동했다. 이어 사민당 제2부대표를 지냈고, 당의 제1부대표직에 있던 중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는 23살이던 2008년 탐페레 시의원에 도전했다가 낙선했고 2012년 재도전 끝에 27살 나이에 당선된 바 있다. 2013~2017년에는 시의회 의장도 맡았다. 2015년엔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됐고, 지난해 재선에 성공했다. 이전 정부에서 교통통신부 장관을 지낸 터라, 당 조직부터 지방자치단체, 국회, 정부 등 이미 다양한 정치경력을 자산으로 간직하고 있다. 34살 나이에 총리에 오른 그를 두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좀체 들리지 않는 이유다. 산나 마린 총리는 총리 선출 직후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나는 이미 정치경력이 10년이 넘었고 그만큼 이 일에 헌신해 동료들과 국민에게 신뢰를 얻었다”고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산나 마린 총리만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교육문화부 장관인 리 안데르손(32)은 2016년 29살 나이에 좌파동맹의 당대표로 선출돼 핀란드 최연소 당대표라는 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그 역시 좌파동맹의 청년조직 대표 출신이다. 2008년 투르쿠시 지방선거, 2011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연거푸 낙선했지만, 2012년과 2017년 투르쿠 시의원 당선, 2015년과 2019년 국회의원을 지냈다.
안톤 뢴홀름(39) 사민당 사무총장은 “결국 사회의 주역은 청년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기성세대가 청년들의 생각을 심각하게 들어줄 필요가 있다”며 “이들이 정치에서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많은 기회를 주고 역량을 키우는 것이 당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헬싱키/신소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객원연구원 soyoung.f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