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범 금융위원장(왼쪽)과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이 6일 금감원에서 새해 회동을 했다. 금융감독원 제공
“
혼연일체가 됩시다.”
지난 6일 정은보 금융감독원 원장이 고승범 금융위원장을 만나 한 말이다. 고 위원장이 먼저 “저와 정은보 원장 취임 뒤 두 기관이 상호협력하는 관계로 완전히 바뀌었다”고 하자, 정 원장이 맞장구치며 한 말이다. 두 사람 발언은 전임 윤석헌 금감원장 시절 형성된 금융위와 금감원 간의 불편한 관계가 해소됐다는 의미가 투영된 발언이나, 관가와 금융권에선 그 이상의 해석도 내놓고 있다. 오는 3월 대선을 앞두고 정부 내 경제·금융 관련 부처의 조직 개편 논의에 사실상 반대 뜻을 두 기관의 수장이 우회적으로 드러낸 게 아니냐는 것이다.
■ 기재부 해체되면 금융위 유탄 맞나?
최근 정치권에서 정부 부처 개편론에 불을 지핀 주인공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다. 이 후보는 지난 2일 <서울방송>(SBS) 인터뷰에서 “국민 뜻이 관철되도록 기재부(기획재정부)에서 예산 기능을 떼서 청와대 또는 총리실 직속으로 바꿀 필요는 있다”며 기획재정부 해체론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기재부가 코로나19 대응에 써야 할 돈을 너무 아끼는 바람에 국민이 고통받고 있다는 명분을 들이밀었다.
기재부 해체는 꼬리를 물고 금융감독체계 개편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그간 금융감독체계는 기재부의 기능·역할 조정의 종속변수였기 때문이다. 현재 금융위원회는 2008년 재정경제부(현 기재부)에서 떨어져 나온 금융산업정책 기능(금융정책국)을 흡수한 금융감독위원회(금감위)가 문패를 바꿔달고 출범했다. 금감위도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재정경제원(현 기재부)에서 금융감독 기능을 떼어 만든 부처였고, 그 때 금감원도 출범했다.
만약 차기 정권이 기재부에서 예산 기능을 떼면 기재부에는 경제정책, 세금정책, 공공정책, 국제금융 기능이 남는다. 여기에 금융위가 쥐고 있는 금융산업정책 기능이 기재부로 다시 이관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본다. 2008년 개편 뒤 국내금융(금융위)과 국제금융(기재부) 기능이 쪼개지면서 비효율이 커졌다는 지적이 있던 터였다.
기재부 기능 조정의 구체안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지만 금융감독체계 개편의 구체안은 이미 법률안으로 발의돼 있다. 민주당 이용우·오기형 의원과 국민의힘 성일종 의원 법안 모두 금융위의 산업정책을 기재부로 넘기고 감독정책은 금감위가 맡도록 했다. 금융위의 한 간부는 “금융감독기구 개편 문제는 대선 때마다 나왔다가 사라지는 주제이긴 하지만 이번에 기재부가 쪼개진다면 금융위가 유탄을 맞아 조직개편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 금융감독과 정책 기능 놓고 벌어진 지난 20년
감독체계를 둘러싼 논의는 연원이 길다. 2003년 카드 대란이나 2008년 금융위기, 2011~2012년 저축은행 연쇄 부실 사태, 2019년 라임·옵티머스 등 사모펀드 부실에 이르기까지 금융 부실이 불거질 때마다 감독 체계 논의가 부상했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핵심 논점은 감독기능과 정책(산업진흥)기능의 관계 설정이었다.
국내 감독체계 변화의 첫 계기는 IMF 외환위기였다. 금융과 기업 부실을 가져온 핵심 원인이 업권별로 뿔뿔이 나뉘어져 있던 감독기구와 각 감독기구를 정부(재경원·현 기재부)가 지배하는 체계에 있다는 공감대에 따라 민간 통합감독기구인 금감원을 출범(1999년 1월)시켜 정책기능을 맡은 정부(재경부)를 견제하는 체계가 형성됐다. 당시 강만수 재경원 차관을 포함해 경제 관료의 반발은 컸지만 비등한 외환위기 책임론 탓에 ‘감독-정책 분리’라는 큰 흐름을 되돌릴 수 없었다. 물론 민간 기구인 금감원을 견제하려 공무원 조직인 금융감독위원회를 만들긴 했으나 조직의 크기가 작아 금감원에 입김을 불어넣기엔 한계가 있었다.
이 체계가 다시 크게 바뀐 건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다. 기획예산처와 재경부를 합쳐 기재부를 만드는 한편 재경부의 금융정책기능을 흡수한 금융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금융감독-정책의 분리 구조가 통합 구조로 변화한 것이다. 당시 정부는 두 기능의 분리에 따라 나타난 정책 수립과 구현의 비효율성을 극복하기 위한 조처로 설명했다. 금융감독이란 공적 권한을 민간 조직에 온전히 맡기는 건 ‘행정권은 정부에 속한다’는 헌법 정신과 거리가 있다는 주장도 이런 개편에 힘을 실었다. 당시 진보 성향 시민단체들과 금감원은 한 목소리로 이런 통합 흐름에 반대했으나 새 정권의 위세 탓에 반향은 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금감원은 금융위가 수립한 정책을 집행하는 사실상의 산하 기구로 위상이 낮아지고 금융위 조직은 꾸준히 불어나는 현상도 이어지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 혼연일체는 사실상 체계 개편 반대론
박근혜-문재인 정부에서도 현 체계는 유지됐지만 감독과 정책 기능의 통합에 따른 부작용과 개편 논의마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1~2013년 저축은행 사태 후폭풍으로 정책-감독의 분리와 함께 소비자보호기구 신설 필요성을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입에 올렸으며, 문재인 정부에서도 취임 초기와 2019년 사모펀드 부실 사건을 계기로 감독과 정책의 분리론이 각각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이런 맥락 속에 국회 입법조사처는 지난 2020년 낸 보고서에서 “금융산업정책기관으로부터 금융감독기관을 예산·인사 상 독립시켜야 한다”란 공개 주장을 편 바 있다.
현 정부는 체계 개편으로 나아가지는 않았으나 운영에서 변화를 줬다. 금융관료 출신이 사실상 독식한 금감원장 자리에 여당과 가까운 민간인를 세번 연속 임명한 게 그 예다. 인사를 통해 금감원에 힘을 싣고 관료 조직인 금융위를 견제하려는 포석이었다. 이에
최흥식·
김기식 원장은 개인 비리 의혹으로 일찍 자리에 물러났으나 바통을 이어받은
윤석헌 원장은 3년 임기 동안 감독 권한을 강하게 행사하며 금융위와 각을 세웠다.
이런 맥락 위에 행정고시 동기(28회)이자 금융관료로서 걸어온 길이 엇비슷한 고승범 위원장과 정은보 원장의 혼연일체론이 자리매김 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 두 사람은 모두 현 체계 개편에 신중한 입장이다. “제도를 자주 바꾸기보다는 현 체제를 유지하며 일할 수 있는 관행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위원장, 지난해 10월 국정감사) “어떤 게 정답인지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고 기능상 중복이나 상충은 미세조정해나가면서 대응하는 게 우선 필요하다.”(정은보 원장, 국정감사)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