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중앙은행과의 통화스와프는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겠지만, 우리(미국) 경제를 보호하는 데 필수적일 수도 있다.”(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원-달러 환율이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통화스와프를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다. 한-미 통화스와프의 체결 가능성과 그 주도권을 갖고 있는 미국의 이해관계를 놓고서도 해석이 제각각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19 사례를 통해 통화스와프의 열쇠를 쥔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속내를 들여다봤다.
■‘달러난’에 유럽 은행들 몰려들자…“미국 보호해야”
국가 간 통화스와프는 통상적으로 중앙은행끼리 일정 기간 자국 통화를 서로에게 빌려주기로 하는 계약을 일컫는다. 한국은행과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통화스와프를 체결한다면, 한은이 원화를 연준에 빌려주고 대신 달러를 받아오는 식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맺은 한-미 통화스와프를 계기로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개념이 됐다. 보통 국내에서 달러가 바닥난 위기 상황에 ‘구원투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연준이 다른 나라에서 구원투수 역할을 자처하는 이유는 뭘까.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에서는 난감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글로벌 주요 은행 중에서는 처음으로 프랑스 베엔페 파리바(BNP Paribas)가 2007년 8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관련된 펀드의 환매를 중단한 게 불씨가 됐다. 이를 계기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대한 위기의식이 짙어지면서 이른바 신용경색 현상이 나타났다. 거래 상대방의 신용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자, 시중은행들끼리 서로 달러 자금을 빌려주는 시장도 얼어붙기 시작했다.
당시 주요 지표들을 보면 위기 상황이 여실히 드러난다. 달러 자금 시장의 신용경색 정도를 엿볼 수 있는 리보(Libor)-오아이에스(OIS) 스프레드(3개월)는 줄곧 0%포인트에 가까운 수준을 유지하다가 2007년 8월 1%포인트 안팎으로 급등했다. 그만큼 신용경색이 심해 달러를 구하기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금융거래의 상당 부분이 유로화가 아닌 달러로 이뤄지던 유럽에서도 위기 경보가 울려왔다.
자국 시장에서 달러를 구하기 힘들어진 유럽 시중은행들이 대서양을 넘어 뉴욕 시장으로 달려오는 건 시간 문제였다. 특히 아직 유럽 장이 마감하기 전인 뉴욕 아침 시간대에 유럽 은행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그 여파로 같은 달 연방기금금리도 연준이 목표한 범위인 5.25%를 벗어난 수준으로 치솟았다. 연방기금금리는 은행이 다른 은행에 지급준비금을 1일간 빌려줄 때 부과되는 초단기 금리다. 다른 각종 시장금리와 다양한 경제변수에 영향을 준다는 측면에서 미국 경제 전반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크다.
연준이 소매를 걷어붙일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연준은 곧바로 달러 공급 확대에 나섰으나 큰 효과가 없었다. 당시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240억달러 규모의 국채를 사들여 시장에 달러를 풀었고, 그 이후에도 유동성 공급이 이어졌지만 신용경색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묘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위기 주범으로 몰릴라” 오히려 스와프 망설인 유럽
연준이 생각해낸 대안 중 하나는 유럽중앙은행(ECB)과 통화스와프를 체결하는 것이었다. 유럽중앙은행으로부터 유로화를 받아 이를 담보로 잡아서 달러를 빌려주자는 아이디어였다. 그렇게 하면 유럽중앙은행이 외환보유고를 쓰지 않고도 더 많은 달러를 시중에 풀 수 있어서, 유럽 시중은행들이 달러를 구하러 미국으로 몰려드는 현상도 사라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이 경우 해당 은행들이 돈을 못 갚게 돼도 그 리스크를 연준이 아닌 유럽중앙은행이 진다는 장점도 있었다. 당시 연준 의장이었던 버냉키는 그의 자서전 <행동하는 용기>에서 “유럽 금융시장의 난기류로부터 미국 시장을 보호격리하는 게 목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오히려 망설인 것은 유럽중앙은행이었다. 유럽 시장의 위기 상황이 지나치게 부각되고, 연준이 유럽의 구원투수 역할을 한다는 인식이 퍼질 수 있다는 우려 탓이었다. 실제로 처음에는 유럽 쪽에서 스와프를 꺼렸다는 게 버냉키의 설명이다. 결국 연준은 유럽중앙은행과 맺은 통화스와프를 별도로 발표하지 않고, 다른 긴급 유동성 공급 조치들과 함께 발표하는 식으로 타협했다. 시장이 유럽 내 금융 불안의 심각성에 덜 주목할 수 있도록 배려한 셈이다.
미국의 통화스와프는 빠른 속도로 확대됐다. 연준은 2007년 12월 유럽중앙은행, 스위스국립은행과 각각 200억달러, 40억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를 체결했다. 총 240억달러 규모였던 연준의 통화스와프는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 6200억달러까지 늘었다. 연준과 통화스와프를 맺은 중앙은행도 모두 14곳으로 증가했다. 2008년 10월에는 유럽과 스위스, 영국, 일본 등 4곳을 대상으로 한도를 무제한으로 설정했다. 당시 유럽중앙은행이 이를 통해 인출한 금액만 3138억달러에 이른다.
첫 시작이 미국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던 만큼, 통화스와프를 맺을 대상을 추가로 선정하는 데 있어서도 같은 계산이 작용했다. 버냉키는 “멕시코, 브라질, 한국, 싱가포르 등 신흥국은 신중하게 선정했다”며 “이들 국가가 미국과 글로벌 금융·경제 안정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준으로 선정했으며, (중요하지 않은) 다른 국가들의 통화스와프 요청은 거절했다”고 밝혔다.
2020년 코로나19로 금융시장이 불안에 빠졌을 때도 통화스와프는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당시에도 단기금융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이에 의존하던 해외 시중은행들이 달러 자금을 구하기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이로 인한 금융 불안이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로 확산되면서 통화스와프 체결의 필요성이 다시금 대두됐다.
당시 미국 연준은 이미 유럽, 스위스, 영국, 일본, 캐나다 등 중앙은행 5곳과 한도가 무제한인 상설 통화스와프 네트워크를 만들어둔 때였다. 상황이 계속해서 나빠지자 연준은 이에 더해 한국 등 9개국 중앙은행과 추가로 통화스와프를 체결했다. 2020년 3월 600억달러 한도의 통화스와프를 맺은 한국은행도 최대 188억달러를 인출해 썼다.
이때도 연준의 계산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와 비슷했다. 달러 자금 시장 여건이 나빠지도록 두면 결국 미국에도 위기가 전이된다는 인식이었다. 2020년 4월 열린 연준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
의사록을 보면, 위원들은 “(한국 등 9개국과 맺은 통화스와프로 인해) 글로벌 달러 자금 시장의 어려움이 완화할 것으로 본다”며 “이로써 (이번 위기가) 미국 가계와 기업에 대한 신용 공급에 미치는 영향도 줄어들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같은 인식은 연준이 여론 악화 가능성까지 감수하며 통화스와프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를 설명해준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연준에서는 통화스와프가 해외 시중은행들에 대한 구제금융으로 인식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나왔다고 한다. 정치권에서 이에 대한 압박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도 있었다. 이에 대해 버냉키는 그의 자서전에 “다행히 내가 만난 대부분의 상원의원들은 글로벌 금융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미국의 이해관계와 들어맞는다는 점을 이해했다”고 적었다.
이재연 기자
ja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