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은행산업을 둘러싼 불안이 확산되면서 정부의 은행권 경쟁촉진 정책이 동력을 잃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한 데 이어 글로벌 대형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까지 위기설에 휩싸인 영향이다. 이처럼 은행 건전성 관리에 집중해야 할 국면에 오히려 건전성을 희생시키는 경쟁촉진에 나서는 것은 ‘정책 엇박자’라는 비판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금융당국은 향후 건전성 관리에 무게를 두며 은행의 자본적립 의무를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16일 금융위원회 발표를 보면, 금융위는 전날 김소영 부위원장 주재로 은행권 경영·영업 관행·제도 개선 실무작업반 제3차 회의를 열었다. 김 부위원장은 최근 실리콘밸리은행의 파산 사태로 스몰라이선스(소규모 인허가), 특화은행 도입 등의 정책이 영향을 받을지에 대해 “금융안정과 소비자 보호를 전제로 은행권 내 실질적 경쟁을 촉진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영수 금융위 은행과장도 이날 “첫 회의 때부터 우리의 경쟁 확대의 기본 전제는 금융안정과 소비자 보호”라고 재차 강조했다. 신규은행 도입 등 경쟁촉진 정책으로 금융안정이 저해될 위험을 충분히 고려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최근 우려가 커지고 있는 은행들의 건전성 관리에도 방점을 찍었다. 금융위는 경기대응완충자본 적립 의무를 올해 안에 부과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경기대응완충자본이란 금융기관이 신용 팽창기에는 자본을 더 쌓도록 함으로써 과도한 신용 증가를 억제하는 제도로 2016년 도입됐다. 다만 아직까지는 코로나19 등으로 인해 실제로 이에 따른 적립 의무가 부과되진 않았다. 올해 금융위는 신용 팽창기가 아니더라도 외부 충격에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2∼3분기에 추가 자본적립 의무를 부과할 계획이다. 은행별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에 따라 추가 자본적립 의무를 부과하는 스트레스 완충자본 제도도 도입하기로 했다.
앞선 금융위의 발표와는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제1차 실무작업반 회의 당시 보도자료를 보면, 특화은행 등 신규은행을 도입하는 데 있어서 금융안정을 고려하겠다는 언급은 없었다. 경쟁촉진은 소비자 후생에는 도움이 되는 반면 금융안정에는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는데, 금융위는 보도자료에서 전자만 언급해온 것이다. 신규은행 도입으로 은행 간 경쟁이 심화하면, 은행들의 수익성이 나빠져 과도한 위험 추구 행위가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한마디로 은행들이 전반적으로 부실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의 은행권 경쟁촉진 정책이 시대에 역행한다는 지적이 나온 이유다. 정책금리 인상기에는 투자심리가 위축되고 신용경계감도 높아져 언제 어디서 금융 시스템이 무너질지 가늠하기 어렵다. 한국의 경우 유달리 규모가 큰 가계부채가 집값 하락과 함께 부실화하면서 은행들의 자산 건전성이 나빠질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지금은 경쟁촉진 정책에 박차를 가할 시기가 아니라는 비판이 제기된 배경이다.
이미 실무작업반 회의에서도 비슷한 문제 제기가 잇따른 바 있다. 1차 회의에서는 은행업 추가 인가가 이뤄질 경우 지금처럼 과잉 영업식 경쟁이 치열해져 은행 산업 전반의 수익성과 건전성이 악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실리콘밸리은행 같은 특화은행의 경우 특정 부문에 여신이 집중돼 해당 부문의 충격을 다른 부문에서 흡수하기 어렵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경쟁을 활성화하기 위해 신규은행을 도입할 경우 일정 기간 건전성 규제를 완화하거나 면제해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우려가 높다.
이는 최근 들어 뚜렷해지고 있는 전세계적인 규제 강화 추세에도 역행한다. 실리콘밸리은행 사태의 여파로 다시 건전성 관리 강화에 나선 미국이 대표적이다. 앞서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시절 중소규모 은행들이 보다 원활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로 건전성 규제를 대폭 완화한 바 있다. 강력한 규제를 적용받는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회사’(SIFI)의 자산 기준을 500억달러에서 2500억달러 이상으로 상향 조정한 것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실리콘밸리은행의 위기 징후가 사전에 포착되지 않은 것은 규제 완화 때문이라는 비판을 제기해왔다.
이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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