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규제를 책임지는 은성수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22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암호화폐(가상자산) 투기가 광풍 국면으로 치달으면서 이를 사실상 방치해온 금융당국의 책임론이 일고 있다. 새로운 금융 투자대상이 출현하면 금융당국이 이 투자대상이 금융투자상품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하고 발빠르게 이에 대한 규제 방안을 마련해야 투자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데 금융당국이 사실상 이를 방치해놓음으로써 화근을 키웠다는 것이다.
암호화폐는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앞으로 ‘지급수단’의 혁신을 이끌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2008년 이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이런 지급수단의 혁신성보다는 암호화폐 거래로 단기적 차익을 노리는 ‘투자성’에 지나치게 관심이 집중됐다. 특히, 암호화폐 관련 거래소(취급업소)들이 단기간에 200개에 육박하는 등 난립하고, 이들 거래소들이 검증되지 않은 코인들을 상장시킴으로써 혼란을 가중시켰다. 관련 지식이 부족한 투자자는 물론이고 단기 차익을 노리는 투기꾼들이 몰려들면서 사실상 ‘투기판’이 벌어진 것이다.
정부는 2018년 초 암호화폐가 문제가 되자 국무조정실 중심으로 관련 태스크포스를 만들었다. 태스크포스는 당시 불법행위에 대해 엄정 대응하겠다고 밝히면서 “가상통화는 법정화폐가 아니며, 어느 누구도 가치를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자기 책임 하에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이런 태도는 올해 4월19일 내놓은 자료에서도 그대로 반복됐다. 구윤철 국무조정실장은 “가상자산의 가치는 누구도 담보할 수 없다”며 “자기 책임 하에 신중하게 판단”해줄 것을 당부했다. 올해 3월부터 시행된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을 제정한 것 외에는 지난 3년간 정부가 해온 일은 없었던 셈이다. 그나마 특금법은 자금세탁 방지를 주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특히 테러자금 연관성에 우려가 많은 미국·유럽 국가들 중심으로 한 국제 공조 차원에서 우리나라에서도 입법화가 진행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국내 투자자들에게 중요한 투자자 보호를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작업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국내에서는 투자자 보호를 받기 위해선 자본시장법상 ‘금융투자상품’으로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금융당국은 이와 관련한 작업은 거의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금융규제를 책임지는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지난 22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의원들의 관련 질의에 “(암호화폐는) 인정할 수 있는 화폐가 아니다”라며 “국민들이 많이 투자한다고 관심을 갖고 보호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부분에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덧붙였다. 은 위원장의 발언은 이에 대한 연구작업이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청한 한 금융연구기관의 연구위원은 “법이나 규제체계가 따라가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를 정부 책임으로 생각하지 않는 태도”라며 “이런 사안이 생기면 연구기관들에 중장기적으로 대비를 하도록 연구작업을 시키고, 그에 기초해서 가이드라인이나 법체계를 준비해야 했는데 우리 정부는 그러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렇게 했으면 이런 상태는 거의 막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금융시장이 가장 발달한 미국의 경우도 암호화폐에 대한 금융당국의 입장이 명확히 정립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몇년간 꾸준히 관련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면서 성격 규정 작업을 진행해왔다.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가 2015년 암호화폐를 상품거래법상 상품의 정의에 포함시키고, 증권거래위원회(SEC)는 2017년 디에이오(DAO)가 발행한 암호화폐공개(ICO)를 증권법상 ‘투자계약’에 해당한다고 해석하는 등 꾸준히 규제를 진화시켜왔다. 올해 4월 세계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인 코인베이스를 미국 증시에 상장시킨 것도 이런 노력의 결과였다. 또다른 금융연구기관의 연구위원은 “미국도 암호화폐를 다 금융상품으로 인정하는 건 아니다. 어떤 것은 법적 지위를 부여해주고 어떤 것은 아예 사전적으로 발행을 금지시킨다”라며 “그러나 우리는 무조건 안된다고만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투자자들은 암호화폐 거래소에 올라온 상품들이 과연 투자할 가치가 있는 것들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시장이 혼탁해지고 피해자가 속출하는 실정이다. ‘투기판’이 워낙 크게 벌어져 이를 제도권으로 편입하려는 논의를 하게 되면 판을 더 키울 것이라는 우려도 분명 존재한다. 은성수 위원장이 ‘가장 걱정되는 건 이걸 공식화하면 투기 열풍이 더 불 것’이라는 취지로 얘기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러나 정부가 적극 개입해 암호화폐에 대한 논의를 공론화하고 관련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거래소나 은행 등에 적용하면 객관적인 정보가 더 많아져 열기가 차츰 수그러들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금융연구기관의 연구위원은 “정부가 투자자보호 차원에서 거래소들이 상장 절차나 공시 등 할 일을 제대로 하는지 점검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박현 기자
hyun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