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산시 옛 반월·시화공단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국가 발전의 장기비전과 전략을 모색해온 ‘정책공간 포용과 혁신’이 단기적인 정책 쟁점뿐 아니라 향후 2050년까지 중장기적인 미래 어젠다를 발굴하고 제시하는 글을 한겨레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포용과 혁신은 2021년 창립된 민간 싱크탱크로서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대한민국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120여명의 진보적인 교수와 연구자들이 모인 정책공간입니다. 게재 글은 격주로 열리는 목요포럼의 발제와 지정토론을 중심으로 임채원 포용과 혁신 정책기획위원장(영국 에딘버러대 방문학자)이 맡습니다.
세계적인 한류 붐과 함께 경영학 분야에서 ‘K 기업가정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인도네시아 등 여러 국가에서 한류의 한 분야로서 한국 기업가 정신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고 있다. 최근 이 분야에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한국 중국 일본의 동아시아 지역 내에서 갈등 증가 그리고 한반도에서 남북 갈등 등의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평화기업가 정신에 대한 모색이 일어나고 있다.
이번 목요포럼에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와 평화기업가 정신’을 주제로 김용진 교수(서강대)가 발제를 하고, 박광기 소장(뉴패러다임연구소)와 이병헌 교수(광운대)가 지정토론을 맡았다.
김용진 교수
“기업의 생존과 번영의 궁극적 원천은 사회와 환경이다. 기업과 사회, 기업과 환경과의 상생과 평화로운 공존은 급증하는 불평등과 기후변화로 인해 심대하게 위협을 받는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기업가 정신은 고용과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 가는 혁신의 원천으로서, 다양한 사회문제를 기업적 방식으로 해결하여 사회적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기업가정신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경제적 패러다임에 기인한다. ESG로 대변되는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에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로의 변화, 온디맨드서비스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제품의 소유 중심에서 문제해결을 위한 서비스 중심으로의 기업 비즈니스모델의 변화, 그리고 유연성으로 대변되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기술적 변화가 그것이다.
기업가가 단순하게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비즈니스 중심의 가치창출 프로세스를 추구해서 더 이상 기업을 성장시킬 수 없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서 기업가는 마치 국제사회(혹은 국내에서도)에서 힘과 기대 간의 괴리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을 적극적으로 조정하고 협력하여 평화를 만들어 내는 전문가들과 동일하게 이해관계자들의 욕구를 이해하고 서로간의 신뢰를 구축하여 지속가능하고 장기적인 가치창출이 가능한 비즈니스모델을 만들어 내야 한다.
따라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와 ESG(Environment 환경, Social 사회, Governance, 지배구조)경영이 지배적 경영이념으로 자리잡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기업가들은 혁신적이고 선제적인 시장창출 역할에 더하여 조화와 협력을 추구하는 평화기업가정신(Pacipreneurship)으로 무장할 필요가 있다. 기업가가 사회와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비전을 가지고,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그 비전을 공유하고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평화기업가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욕구를 이해하고 신뢰를 구축하여 지속가능한 장기적 가치창출 사업모델을 구축하는 기업가로 정의할 수 있다.
평화기업가는 혁신적이고 선제적이며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가지향성을 토대로 자원의 효율적이고 윤리적인 사용이 가능한 투입시스템, 사람 중심의 윤리적이고 공정하며 조정과 협력이 가능한 프로세스의 구축, 사회, 환경, 글로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자세히 논의하면 아래와 같다.
평화기업가는 자원의 난개발과 과도한 사용이 현재의 환경적·사회적 위기를 불러왔음을 인지하고, 보다 효율적인 자원활용기술과 방법을 개발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적용하여 환경과 사회 친화적인 제품·서비스를 제공한다. 평화기업가는 비윤리적인 자원개발과 비윤리적 노동을 통해 축적된 부가 우리 사회에 큰 불행을 초래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보다 윤리적인 자원개발과 공정하고 윤리적인 노동관행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평화기업가는 모든 개인의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고, 차별과 억압 없는 환경을 조성한다. 모든 구성원이 공정하고 안전하며 존중받는 환경에서 자신들이 가진 최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장려한다. 평화기업가는 인종, 성별, 종교, 교육, 출신 국가, 문화 등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한다. 상호 이해에 바탕한 다문화적 협력과 교류를 통해 혁신적 아이디어와 창의적 솔루션이 만들어지도록 체계화하여, 공동 번영과 평화를 추구한다. 평화기업가는 개방적인 의사소통과 협업 문화를 조성하여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요구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수렴·조정하고, 이해관계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한 균형잡힌 성장을 추구한다. 평화기업가는 윤리적 경영을 원칙으로 삼고, 정직하고 투명한 비즈니스 관행을 따른다. 또한 공정한 경쟁을 지지하고, 부패와 부당한 영리 추구를 거부한다. 평화기업가는 이해관계자들의 참여와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성과가 각자의 역할에 준하여 공정하게 배분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투명하고 공정한 성과배분을 통해 모두가 행복하게 성장하는 기업세상을 만든다.
평화기업가는 불평등이나 빈곤 등 사회문제를 기업적 방식을 통해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가용성과 접근성을 높이는 혁신적 비즈니스모델의 개발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을 포용함으로써, 보다 풍요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한다. 평화기업가는 기후변화, 재난, 생물 멸종 등 다양한 환경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혁신적 기술과 비즈니스모델 개발을 통해 지속가능한 성장을 추구한다. 친환경적 제품과 서비스의 개발 등을 통해 환경 문제 해결에 기여함으로써 미래 세대를 위한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한다. 평화기업가는 글로벌 비즈니스 환경과 문화를 이해하고, 현지화 전략을 수립하며, 국제적인 파트너십을 형성하여 개별 국가가 가진 사회·환경문제를 기업적 방식으로 해결함으로써 세계 모든 국가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추구한다.
이러한 기업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평화기업가는 세가지 특성을 갖는다. 첫째는 적응성(Adapability)이다. 평화기업가는 고객욕구의 변화, 사회적 환경의 변화, 경제환경의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변화에 맞도록 기업의 시스템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창의성이다. 물론 전통적인 기업가들 또한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 내기 위한, 그리고 자원의 제약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창의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평화기업가는 약자를 위한 솔루션, 환경을 위한 솔루션, 글로벌 문제해결 솔루션을 보다 싸고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탁월한 창의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협력성이다. 평화기업가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니즈를 이해하고 이들의 이해를 충족시킬 수 있는 솔루션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은 기업가 혼자서 하기 매우 어렵다. 공동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비즈니스생태계의 구축과 유지는 평화기업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책무이다. 또한 평화기업가들은 전통적인 기업가들과 다르게 사업에 필요한 자원을 공동체로부터 획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지역공동체나 글로벌 공동체와 협력프로세스를 만들고 이들의 적극적인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세계 각지에서 평화기업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 적은 사회문제, 더 적은 환경문제, 그리고 더 적은 글로벌 문제를 가진 보다 평화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지정토론에 나선 박광기 소장은 ‘초격차는커녕 초저성장이 오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기업가 정신이 기업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지금 우리 경제에는 초격차는커녕 초저성장이 오고 있다. '팽창한 것은 반드시 수축한다’. 제조판매업으로 팽창한 한국 경제는 수축과정의 산업전환기에 있다. 지난 50여년간 수출주도 압축성장으로 국내에 급격하게 늘려온 생산능력이 수출이 줄어들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수출설비가 대안을 찾지 못해 내수로 몰리면 공급력의 과잉을 초래하고 이들 과잉능력을 각자도생 생존 경쟁에 의한 자율적 구조조정이 되도록 시장에 맡겨둔다면, 내수시장 규모에 맞게 생산력이 축소된 우리 경제는 ‘초저성장 단계’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공급력 과잉이 생산성 저하를 불러오고 저생산성이 현금흐름으로 나타난 결과가 부채급증이다. 이미 지방소재 대다수 중소제조기업들은 저생산성 사업체를 부채로 연명하면서 지역경제의 기반이 되기는커녕 각종 보조금 등 세금먹는 하마(밑빠진 독)로 전락하고 양질의 일자리는커녕 수입 노동자 일자리로 변질되고 있다. 십수년간 구조개혁을 외쳐도 되지 않는 것은 국내에는 과잉생산력을 받아줄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우리 정부의 산업정책은 유망 첨단산업을 선정해 초격차 기술우위 전략을 지원하는 경쟁 우위기반의 소위 ‘포트폴리오 대체식 신산업 정책’이다. 첨단분야는 미래 산업으로 당연히 키워야 하고 기술선진국이 우리의 미래 지향점임에는 분명하나 경제전반의 생산성을 올리려면 전통산업에 묶여있는 노동과 자본이 원활하게 새로운 산업에 재배치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줘야 한다. 앞으로 정부 기업 가계 모두 부채에 짓눌려 통화정책, 재정정책도 경기 활성화 대책으로 쓸 수 없는 한계 상황이 온다. 무슨 대안이 남아있나를 자문하게 된다. 산업정책은 곧 기업 일감과 국민 일자리를 만드는 정책이다. 전통 산업의 업종과 기술은 해당 제품시장이 포화되고 경쟁이 가열되면서 개별 기업으로는 성장 기회가 제한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보유한 업종과 기술포트폴리오를 수단으로 국제사회에 다양한 개발 아젠다를 해결하는 융합사업을 기획하면 새로운 사업기회는 널려있다. 예를 들어 동남아 각 국은 철강자립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이들 국가들과 제철산업 육성 파트너십 사업을 펼치면 국내 철강산업의 출구가 생겨난다. 포트폴리오 대체가 아니라 기존 포트폴리오를 활용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기업가정신 기반 산업정책’이 요구된다.
또 다른 지정토론자 이병헌 교수는 기업가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했다.
“인구문제, 기후환경문제, 저성장과 양극화 등 사회경제 문제가 심화되고 있는 대전환기를 맞이하여, 기업과 기업가들에게 요구하는 사회적 책무는 날로 커지고 있다. 하지만, 해방 후 국가 주도의 산업화 과정에서 정부의 지원과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 우리나라의 기업과 기업인들의 사회적 책임 의식은 매우 낮은 수준이다. 공개 상장된 주식회사를 마치 개인기업처럼 운영하는 경우가 많으며, 사회의 반기업 정서를 탓할 뿐 사회공헌이나 사회적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기업가들은 많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해관계자들간의 협력으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평화기업가정신은 우리 기업과 기업가들게 매우 필요하다. 평화기업가정신은 기업가에 의한 기업활동이 공통체의 유지와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이러한 기업가정신은 기업가의 경영철학 즉 가치관, 역사관, 세계관이 보다 포용적이고 공동체를 위한 것이어야 가능하다.
정책적으로는 어떻게 평화기업가정신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기업가들을 대상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경영철학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정부 지원 사업의 평가에서는 CEO의 기업가정신이나 기업의 ESG 활동을 평가요소로 포함해야 한다. 특히 중소벤처기업에 있어서도 소유와 지배구조 개선이 이루질 수 있도록 하는 ESG 평가체계를 도입해야 한다. 또한, 중소벤처 기업의 법인격을 주식회사에서 종업원 중심의 협동조합이나 합자회사나 유한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유도하는 정책도 필요하다.”
전통적인 서구 기업가정신에 익숙한 상황에서 한국 기업가정신은 동아시아 정체성을 넘어 보편적 가치를 가진 새로운 기업가정신으로 주목받을 수 있다. 평화기업가정신은 동아시아에서 시대적 요구에 맞는 새로운 기업가 정신으로서 실험적인 시도로서 앞으로 이론과 실천에서 성과를 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