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정치인을 망가뜨린다
일상의 규범을 깬다
풍자를 넘어선 웃음을 즐긴다
왜냐고? 재밌으니까!
국내 엠피3(MP3) 음원 업체에서 일하는 박만규(31)씨는 컴퓨터를 켜면 바로 ‘즐겨찾기’를 눌러 ‘디시 인사이드’에 접속한다. 패러디 유시시(UCC·사용자 제작 콘텐츠)를 보기 위해서다. “그냥 웃는 거죠.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이 한순간에 망가지잖아요. 부시 대통령에게 신발 던지는 게임은 정말 재밌던걸요.”
박씨처럼 많은 누리꾼들이 ‘패러디의 재미’에 빠져 산다. 세상을 비틀고 비꼬는 패러디를 통해 일상의 무료함과 답답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어떤 인기 작품을 변경하거나 과장해 익살 또는 풍자의 효과를 노린다”는 패러디의 사전적 정의를 제대로 즐기는 셈이다.
화염병 대신 웃음을 던진다
누리꾼들에게 패러디는 하나의 놀이다. 나은영 서강대 교수(신문방송학과)는 패러디에 빠지는 누리꾼들의 심리를 “일상적인 규범을 파괴하고픈 충동”이라고 정의한다. 패러디란 “전통 탈춤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희화화해 풍자하며 즐기는 놀이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인터넷을 달구는 패러디에서 ‘풍자’는 필수요소가 아니다. 2009년 화제의 검색어로 뽑힌 ‘내가 고자라니’나 ‘디제이 쿠’는 별 의미는 없지만 오로지 ‘재미’ 하나로 인터넷을 접수했다. 감각의 속도를 즐기는 누리꾼들은 풍자를 넘어선 재미를 갈구한다.
‘루저녀’의 발언을 패러디한 ‘세계를 이끄는 루저들’. 왼쪽부터 나폴레옹, 오바마 미국 대통령, 브라운 영국 총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
패러디가 단순히 ‘의미없는 웃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패러디의 아버지 격인 그리스·로마 시대의 시인 히포낙스의 풍자시를 읽은 이가 자살을 한 것처럼 패러디는 ‘촌철살인’의 마력을 갖고 있다. ‘거대 권력’을 대상으로 한 패러디가 누리꾼들을 사로잡는 까닭이기도 하다.
2009년 인터넷을 달군 패러디 ‘사무라이 조’는 경찰이란 공권력 앞에 무기력한 대중들이 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이자 공격이었다. 시민을 향해 마구잡이로 진압봉을 휘두르는 경찰을 ‘사무라이’라고 조롱한 것이다. 최근엔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을 꼬집는 패러디가 인터넷을 누빈다. 도시건설 게임인 ‘심시티’를 합성한 패러디가 대표적인 예다. 그런 패러디가 권력을 향해 던지는 것은 화염병이나 돌멩이가 아닌 ‘웃음’이다.
2002년 방영됐던 드라마 <야인시대>의 한 장면을 패러디한 ‘고자라니’ 패러디.
패러디는 그야말로 ‘개인의 창작물’이다. 대부분 자신의 ‘블로그 주소’나 ‘닉네임’을 패러디 한구석에 낙관처럼 찍는다. 인기 텔레비전 드라마 <아이리스> 홍보포스터에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의원을 합성한 한 블로거는 “오랜만에 만든 기분전환용 패러디”라고 후기를 남긴다.
이런 ‘즐거운 저항’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은 갈린다. 누리꾼들의 건강성으로 보느냐 가벼움으로 깎아내리느냐에 따라 저울이 기우는 방향이 달라진다. 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는 “패러디를 통한 가벼운 접근은 대중들이 즐겁게 정치에 참여하는 건전한 정치문화 형성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김준석 동국대 교수(정치외교학과)는 “정치 패러디물 대다수가 감각적이고 단편적인 것들이어서 자칫 중요한 핵심을 간과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왼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얼굴과 힐러리 상원의원을 합성한 패러디.
(오른쪽) 미국 대통령 선거기간 중 오바마 후보에게 지지를 표현한 패러디. 오바마가 ‘신’처럼 물 위를 걷고 있다.
명예훼손? “그때그때 달라요”
패러디라고 마냥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명예훼손’이라는 법의 심판이 불청객처럼 따라붙는다. 실제로 ‘사무라이 조’ 패러디는 당사자인 경찰관의 요청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명령으로 대부분 삭제된 상태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치명적 수치심을 안겨줄 수 있는 ‘루저녀 패러디’는 아직도 인터넷에서 활개치고 있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잣대가 패러디 ‘검열’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오씨는 “우리나라는 외국에 비해 권력을 대상으로 하는 패러디를 규제하는 기준이 엄격하다”며 “패러디를 명예훼손·저작권 등 법적 잣대로만 접근할 경우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